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42년 (문단 편집) == 개요 == '''[[유럽]] 및 [[태평양]] 전선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광풍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것과 동시에 모든 추축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해'''.[* 2차대전에서 가장 치열했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전투들은 대부분 이 해에 몰려 있는데, [[대서양 전투]]에서 U보트가 전쟁으로 가장 큰 전공을 올린 해가 1942년이고, 일본과 미국 해군 전력 차가 [[미드웨이 해전|잠시나마 가장 좁혀진 시점]]이 1942년이며, 나치군이 가장 모스크바에 근접했던 시점도 1942년, 일본에 처음으로 미군 항공기가 들어온 시점도 1942년, 롬멜을 비롯한 아프리카 군단이 가장 혈투하던 시점도 1942년, [[남방작전|중국 전선이 최악으로 치달았던 시점]]도 1942년이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추축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는데, 독일은 6월 28일을 시점으로 [[청색 작전]]을 발동해 [[캅카스]]를 향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이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캅카스를 점령하기 위한 A집단군과 그들의 후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B집단군으로 나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최악의 시가전으로 정예군 소모를 강요당했다.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소련의 [[천왕성 작전|반격]]으로 파울루스의 6군이 포위당해 전멸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부전선의 공세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린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지 단 6개월 만에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완전히 침몰시켜버리며 태평양 전선에 대한 공세능력을 궤멸시켜버렸다.]특히 동부전선에서는 [[나치 독일]]이 모스크바를 코앞에서 놓쳤지만 청색 작전을 발동, 카프카스와 볼가 강까지 도달하는 등 [[추축국]]의 최대판도를 기록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공방전|레닌그라드를 사수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도 지켜내었고]], 그리하여 이 해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점점 독일의 우세가 약해지기 시작한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둘리틀 특공대|특공대를 보내 도쿄 한가운데에 깜짝 공습을 가하는]] 한편 [[미드웨이 해전|일본의 네임드 항모 네 척을 함재기를 가지고 치열한 전투 끝에 가라앉혀서]] 태평양의 제해권을 잡음과 동시에 항모의 시대를 열었다. 이것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도권은 연합국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반도]]에서는 8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가 집권하면서 징병제가 실시되어 무고한 [[한국]] 청년 및 소년들이 강제 징집 및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고 부녀자 및 처녀나 소녀들도 정신대 및 [[위안부 문제|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전락당하는 비통을 겪기도 했던 격랑의 해였다. 특히 위안부를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문제는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갈등거리로 남아있다. 본해 개최될 예정이었던 [[1942 FIFA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당연하게도]] 취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