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대 (문단 편집) ==== 한국 음악 ==== 대중음악계에선 [[음반]]의 100만 장 판매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2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더블밀리언 앨범도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음반판매량의 황금기'''나 다름없었던 시절이다. 90년대의 음반 판매량은 이후 한참이 지난 2015년 이후 K-POP 아이돌 팬덤의 규모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구급으로 커지면서 다시 100만장이 넘는 음반의 출현을 회복했다. 다만 이 당시의 음반 판매량은 한류 열풍과 세계화 진출 이전의 순전히 내수와 대중성만으로 기록한 일들이었기에 현재의 음반 판매량과 일대일 비교가 다소 힘든 편이다. 이후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97년 야간정액제, 98년 케이블 인터넷, 99년 [[ADSL]]의 보급으로 2000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후 추락을 거듭하여 2007년부터는 800억대 선까지 내려왔으나 온라인 음반시장은 자리를 잡아가면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음반판매량에 있어서는 댄스와 발라드음악이 절대적으로 그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힙합문화의 도입을 제외한다면 장르적 다양성은 차라리 1980년대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전람회]], [[015B]]와 같이 대학생들이 가요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있었다.[* 확실히 이건 [[MBC 대학가요제]]의 공이 컸다. (그런데 015B는 전신이었던 [[무한궤도(밴드)|무한궤도]]부터 생각하자면 1988년 데뷔다. 하지만 일부 멤버를 015B에 맴버로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015B는 사실상 무한궤도를 계승하는 그룹인 것이다.) 하지만 대학가요제로 대학생이 가수로 데뷔하는 건 대학가요제가 만들어진 시기인 1970년대 후반부터 있었다. 단지 1970년대 후반의 대학생들이 아마추어의 풋풋함이 있었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대학생 가수들은 등장부터 이전 선배들과는 다른 프로 뮤지션으로서 데뷔했다는 차이가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음악그룹)|듀스]], [[김건모]], [[신승훈]] 등의 아티스트가 등장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 댄스, 랩 장르의 뮤직을 주류로 이끌었으며 기존 가요와 다른 파격적 시도들을 함으로써 명실공히 199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김건모]], [[신승훈]] 역시 각자의 장르[* 김건모의 경우 레게 팝을 비롯한 흑인 음악과 댄스곡, 신승훈은 정통 발라드]에서 걸출한 실력과 압도적인 위치를 뽐냈고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와 히트곡들, 엄청난 상업성을 누리며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3대장의 위치를 가졌다. '현진영과 와와' 출신인 이현도와 김성재가 결성한 [[듀스(음악그룹)|듀스]]는 1993년에 데뷔하여 매니아층을 만들었고 대표적 곡인 '[[나를 돌아봐]]', '[[우리는#s-2|우리는]]', '[[여름안에서]]', '[[굴레를 벗어나]]' 등을 내놓고 인기를 누려가고 있었으나 1995년 7월 콘서트를 끝으로 해체를 발표했고, 보컬이던 [[김성재]]가 11월 19일에 솔로 1집을 내고 같은 날 SBS <생방송 TV가요20>을 통해 데뷔공연을 열었으나, 다음 날인 20일 그가 [[김성재 의문사 사건|의문사]]를 당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97년 래퍼 [[이현도]]가 미발표곡 등을 담은 를 내면서 그룹의 역사를 끝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불과 2~3년 사이에 가요계는 젊은 취향의 세련된 음악 위주로 교체되면서, 구시대 음악을 하던 [[86세대]] 이상의 기성 가수들 대부분이 가요계에서 '''"쓸려나갔다."''' 86세대 나이대의 가수들 중에서도 과거 [[트로트]] 위주의 가요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추구하고 변화에 동참한 [[이승철]], [[이승환]], [[박미경]], [[신효범]], [[김광진(가수)|김광진]], [[신승훈]], [[김건모]], [[김종서(가수)|김종서]], [[신해철]], [[임재범]], [[김현철(가수)|김현철]], [[이소라(가수)|이소라]], [[엄정화]] 등은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 거듭났고 상당수는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얻는 거장이 되었지만, 80년대까지의 성인가요풍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수들은 한순간에 구시대 퇴물 취급당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들은 아예 가요계 활동을 접거나 라이브카페에서 활동한다든지, [[트로트]]가수로 전향해 뒷골목 행사를 돌면서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진 60년대생 이상 기성세대만을 위한 가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기 세대가 즐기던 음악과 뮤지션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본 [[86세대]]들은 이때의 변혁에 피해의식을 갖고 증오하면서 '''"[[꼰대|가요계가 10대 취향 위주로만 돌아간다]]"'''라고 주장하며 90년대 이후 새로운 음악을 선호하는 [[X세대]]이하와 갈등을 겪게 된다. [[뮤직비디오]] 문화 등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 시대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였다. 서태지가 음악이 아닌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세일즈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제작시장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며, 이는 1995년 m.net이나 KMTV 같이 케이블 TV 시대를 맞아 생겨난 음악 채널들의 탄생과도 궤를 같이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음악시장에서 뮤직비디오라고 할만한것은 없었으며,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음악 쇼 프로그램에서 즉석무대를 갖춰주는 일종의 유사 뮤직비디오들이 그나마 갖출 수 있는 가수들의 비주얼 판촉수단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한국에서 [[레이저디스크]]가 영 힘쓰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특히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했던 1980년대 이전 가수의 평가기준은 순수하게 가창 실력 및 음악 그 자체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조용필 등이 이러한 시스템 하의 최대수혜자(중 하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이 문단은 [[독자연구]]/[[집단연구]]임을 밝힌다.] 이에 따라 가요 프로그램 립싱크도 무분별하게 증가하면서 '립싱크 논란'이 가요계나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크게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1997년 KBS2 <가요 톱10>이 립싱크 표시를 붙여 구분시키고,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이 국내 최초로 올 라이브 무대로 전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에 데뷔하였고, 1집 때 데뷔곡인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로 처음 히트하여 1993년 여름에 '[[하여가(서태지와 아이들)|하여가]]' 등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지만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 3집|3집]] 활동 당시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백마스킹|거꾸로 돌리니]]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며 여론이 시끄러웠다. 1995년 10월에 4집을 내놓으며 '[[Come Back Home]]'으로 활동하며 '시대유감' 사전검열 문제에 저항해 '''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했고,''' 이들의 음악들은 한결같이 기성 가수들의 것과 달리 내용/형식 면에서 차별성과 독창성을 지녔고, 우리 사회 속의 온갖 억압적 요소들에 얽매인 청소년들에게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1996년]] 1월 성균관 유림회관에서 은퇴 선언을 했고, 태지보이스를 따르던 벗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서기회)'란 비영리 문화단체를 세워 그의 자유와 도전정신을 기렸다. 그 이후부터는 서태지의 영향을 받은 [[H.O.T.]]를 필두로 한 1세대 [[아이돌]] 음악의 [[홍수]]가 시작되었으며, 심지어 '[[IDOL(한국 가수)|IDOL]]' 등과 같이 중~고등학생까지 가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독창성 및 대중화에 독특한 전략을 지니지 못했고, 초창기였던 만큼 일본과 영미권 음악산업을 데드 카피하는 악습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직면했었다. 지금은 한류다 뭐다 해서 아이돌 음악의 위상이 나아지긴 했지만 이때는 현재와 같은 아이돌 문화가 걸음마를 떼던 단계였던지라 성숙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로 음반판매량이 줄고 주요 음반도매상들이 연쇄 도산했고, 50만 장 이상을 찍은 음반이 1997년 15개에 비해 1998년 들어 H.O.T., 서태지, 김경호 등 10개에 불과했다. 이보다 더 타격을 받은 건 데뷔앨범을 내려던 신인 댄스그룹들이었다. 1995년 홍대 일대의 클럽 [[드럭]]을 중심으로 [[펑크 록]] 위주의 인디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96년]] 11월 기념비적인 앨범인 Our Nation Vol.1이 발매되고 '스트리트펑크쇼' 등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7년에 황신혜밴드가 펑크 음악을 대중화시키기도 했으나 외환위기로 인해 록이나 펑크 같은 실험적 음악들이 쇠퇴했고, 대신 박진영의 나 엄정화의 같은 복고풍의 가벼운 댄스팝이 히트를 쳤다. 그 해에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110만 장을 기록해 히트곡으로 급부상했고, H.O.T.의 <열맞춰>와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 신승훈의 <지킬 수 없는 약속> 등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특히 김종환의 2년 연속 빅 히트는 성인가요의 존재를 확인시켜줬는데, 이는 창법과 가사가 진부하긴 해도 당대 가요계 변방이던 주부층의 강력한 구매력이 메꿔줬다. 1999년 들어서 mp3 등 신종 음악매체가 등장하여 기존 음악유통 및 제작시스템에 변화를 불어넣었고, 기존 대형 음반사들도 mp3 시장에 연거푸 뛰어들었다. 이 시기 들어 뮤지션들도 인터넷을 통해 데뷔하거나 음반을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미국 버클리음대 유학생인 신인래퍼 조PD는 PC통신 나우누리를 통해 노래를 업로드하면서 뭇 청소년들의 각광을 받았으며, 한 매니저가 음반을 냈으나 욕설 때문에 19금 딱지를 받아 '표현의 자유' 논란도 불거졌다. 다만 그는 인터넷으로 인한 가수 시스템의 변화를 예고해 수많은 신인들도 인터넷에 음반을 홍보해왔다. 심지어 오락실에서도 음악과 비디오게임을 조합한 'DDR' 역시 한국에서 유행했는데, 이는 n세대가 디지털 첨단기술로 음악의 DIY를 즐기고 있음을 보여줬다. 새 천년을 앞두고 조용필은 각 언론들이 실시한 '20세기 한국 최고의 가수'로 선정됐고, 그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20세기 최고의 노래로 선정됐다. 그는 11월 중순에 대중가수로서 최초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해 큰 주목을 받았으며, 티켓 1만여 장이 공연 한 달 전에 매진될 정도로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동년 대중가요계에서 두드러진 가수는 단연 조성모인데, 이는 <후회>와 <슬픈 영혼식>을 불러 최단시간 내에 100만 장을 넘었고, 1~2집이 연속 밀리언셀러 반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특히 <슬픈 영혼식>은 한 해 2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1990년대 중후반 구미권에 열풍을 불러일으킨 테크노도 1999년 한국에 상륙했는데, 이는 '기계와 인간의 조화'라는 기본 이념과는 달리 단순한 형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전국 곳곳에 테크노 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그 안에서 젊은이들이 고개를 흔들어내는 춤 때문에 일명 '도리도리춤'이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해외 뮤지션 내한공연 중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의 콘서트가 수차례 연기 끝에 그해 6월 25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됐으나 부진한 흥행성적을 냈다. 민중 노래판에선 [[조국과 청춘]], [[꽃다지]], 희망새, 천지인 등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1992년부터 활동한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은 종전 대학 노래패 단위 창작활동에서 지역 대학생 노래단 중심으로 바꾸는 데 일익했으며, 이들의 성공은 부경총련 '좋은친구', 경기남부총련 '천리마', 남총련 '한반도' 등 지역별 대학생 노래단 탄생에 자양분이 됐다. 또 '천지인'이라는 노래패는 민중가요 사상 최초로 락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신세대 열풍과 연세대 사태 등으로 민중가요의 영향력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일제 및 독재시기 산물이던 '음반 사전심의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때 이루어졌는데, 이는 민중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1990년 <아, 대한민국...>, 1993년 <'92 장마, 종로에서>라는 두 음반을 사전심의 없이 냄에 따라 불법 딱지를 받은 데서 기인했다. 이에 그는 1993년 이후 음반 사전검열제를 타파키 위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고 음비법 개정을 위해 국회 문공위 소속 의원들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여론형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 사건'을 계기로 기폭제가 되어 1996년 6월 7일 개정 음비법 시행에 따라 사전심의제가 사라졌고, 10월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정했다. 국악/클래식계 입장에선 의미있는 시대였는데, 이는 1993년 <서편제>의 성공으로 판소리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고, 국악계와 언론이 전통음악 전체로 눈을 쏠리게 만들면서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정하게끔 만들었고, 1994년 들어 국악의 해 외에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및 '서울 정도 600주년', '중요 무형문화재 지정 30주년' 등이 맞물려 이를 기념하는 대형 행사 및 무대가 펼쳐졌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백혜선, 제니퍼 고, 엘린 문이 참가자 284명 중 3, 2, 4위를 각각 따내 큰 주목을 받았고,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엣 강이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첼리스트 장한나가 프랑스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각각 우승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그해 9월에 한국 최초로 '윤이상 음악제'가 서울, 부산, 광주 등 3곳에서 공연됐으나, 정작 윤이상 작곡가가 안기부와의 마찰로 조국에 오지 못했음에도 무난히 잘 치러졌다. 당시 연주됐던 곡은 오페라 <꿈>과 <교향악 제3번>, <클라리넷 5중주>, 실내악 작품 등 10곡이었다. 1990년대 들어 [[조수미]], [[장영주]],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백혜선]], [[신영옥]], [[홍혜경]], 유진 박 등 해외파나 교포 스타들이 떠올랐고, 임헌정 부천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등 국내파도 떠올랐는데, 이는 '세계화 시대의 도래'를 실감케 할 뿐더러 일부 계층만이 아닌 모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은 게 당대 특이점이었다. 재야사학자 임영태의 견해에 의하면, 그 요인으로는 TV와 같은 영상 매체의 발달, 국민들의 국제화에 대한 의식 진전,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문화적 욕구 증진 등이 꼽힌다. 클래식 음반 중에선 1994년 조수미 1집 <새야 새야>가 히트를 치기 시작해 1996년 <디어 아마데우스>, <베스트 앨범> 등 2개 음반이 10위권 안에 들었다. 신영옥 앨범 <아베 마리아>가 발매 2달 만에 6만 장이나 팔려 1996년 12월 판매순위 1위에 올랐고, 장한나 데뷔앨범도 6만 장이나 팔려 1996년 국내 클래식 앨범 판매순위 10위권에 들었다. 1996년 국악계에선 가장 큰 성과로는 서울 서초동에 국악전용극장 '예악당'이 문을 연 걸 꼽을 수 있다. 9월 4일엔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공연된 김덕수-안숙선 합동공연 <공감>은 제목에 걸맞게 관객들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