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대 (문단 편집) === 방송 === 1990년 3당 합당 후 노태우 정권은 이때를 기회삼아 방송민주화를 위해 진력하던 서영훈 KBS 사장을 사임시키도록 압박을 넣었고, 이에 따라 서영훈 사장이 물러나자 서기원 전 서울신문 사장을 KBS 사장에 꽂아넣어 관영방송화를 기도했다. 이에 양심적 방송인들은 방송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4월부터 총파업을 벌였지만, 공권력의 진압과 해직 등을 당해 탄압을 받았다. 이어 정부는 7월에 방송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민영방송을 허용하는 한편, 방송정책 의결권을 공보처가 맡고 방송위원회는 심의만 맡는 식으로 정부 주도의 방송장악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영 종합방송이 다시 허가되었으며, 10월 새 민방 사업자로 [[태영건설|태영]]이 선정되어 11월 14일 서울방송([[SBS]])이 출범했다. SBS는 1991년 3월 20일 AM 라디오, 12월 9일 TV 채널을 각각 개국했고 1996년 11월 14일에는 FM 방송을 시작했다. SBS는 수도권 지역 민방으로 개국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1995년 5월 14일 [[KNN|부산]], [[TBC|대구]], [[광주방송|광주]], [[대전방송|대전]] 지역민방이 개국하면서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1997년 [[울산방송|울산]], [[청주방송|청주]], [[전주방송|전주]] 지역민방의 개국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반면 [[인천방송]]은 비 SBS계 지역민방으로서 처음 개국했다. KBS의 교육 채널[* [[KBS 3TV]], [[EBS FM|교육FM]].]이 [[한국교육방송공사|EBS]]로 독립한 것도 이 시기다. 1990년 12월 27일 KBS의 교육방송 편성권이 제작처인 [[한국교육개발원]]으로 이관되면서 독립된 교육방송이 출범했고, 기존 KEDI 교육방송본부는 '교육방송원'으로 승격했다가 1997년 '한국교육방송원법' 제정으로 한국교육방송원으로 독립했다. 단, 송신은 2019년 현재도 KBS가 맡는다. 1995년 3월 1일 케이블TV 방송 출범을 전후해 각 지역별로 점차 케이블SO들이 우후죽순 설립됐는데, 이들은 대기업이나 향토기업들이 출자한 것이다. 채널들 중 뉴스전문채널 [[YTN]]과 훗날 종합편성채널로 전환되는 경제채널 [[MBN]], 음악 전문 채널 [[엠넷]] 등을 비롯한 20개 채널이 개국했다. 같은해 8월 1일에는 한국 최초의 홈쇼핑 채널인 [[CJ오쇼핑|삼구쇼핑]]이 개국했고 12월 1일 [[투니버스]] 등 5개 채널이 추가 개국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아직 케이블 방송 보급률이 낮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6년 1월 14일 '무궁화 위성 2호' 발사에 성공하자 7월 1일 KBS가 디지털 위성 TV 시험방송을 개시했고 1997년 8월 27일에는 EBS가 위성 방송을 개시했다. 이런 와중에 기존 언론재벌과 재벌언론들이 전광판, 문자방송 등 유사방송매체(뉴미디어) 사업을 개시했으며, 삼성과 LG, 현대, 대우, 진로 등 유력 재벌들도 영상산업에 적극 진출하여 1990년 약 1조 2천억원에서 1995년 3조 1천억원으로 확대되어 2000년에 4조 9천억원대로 오를 지 모른다고 전망할 정도로 '블루오션 마켓'이 됐다. 이들의 영상산업 진출은 CATV는 물론 영화제작, 외국영화 수입, 멀티미디어 등지에 걸쳐 이뤄졌는데, 특히 CATV 시장에 진출하면 SO를 운영하지 않고도 프로그램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프로그램 공급자로 성장하면 위성방송 채널을 종전의 지상파 방송사로 감당할 수 없을 때 프로그램 공급능력을 지닌 영상업체들이 유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대기업들이 점차 CATV에 손을 떼자 동양그룹과 제일제당그룹 등 신흥 미디어재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고, 1999년에는 여야 간 공방 속에서도 '통합방송법'이 통과되어 방송위원회가 방송정책 결정권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또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 TV 매체가 정치권에서도 위력을 보인 것이었다. 1987년 처음 시도된 TV정치는 1992년 14대 대선과 1997년 15대 대선 때도 본격화됐는데, 14대 대선 때 김영삼 후보 측의 소극적 태도 및 방송사의 무성의로 토론회를 못 열었으나 후보자 및 지지자의 TV유세와 공정선거를 위한 TV 토론회 등이 열려 본격적으로 'TV 정치시대' 개막을 알렸다. 1995년 선거법 개정으로 방송 연설, 경력 방송, 후보자 토론 무제한 허용 등 TV 정치방송 활성화가 이루어지면서 제1회 지방선거 때 첫 막을 올렸다. 이로써 후보들은 유세장보다 방송을 이용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으며, 광역단체장 후보 55명 중 46명이 TV 연설 및 광고를 이용했고 광고는 총 105회, 연설은 60회나 방영됐다. 방송 3사 중 가장 많은 광고/연설을 유치한 MBC는 선거 특수로 15억여 원을 벌었다. 이들 중 관심을 끈 건 국내 최초로 개최된 후보자 토론회 생방송이었는데, 특히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조순-박찬종-정원식 3파전이 더 관심을 쓸었으나, 후보자의 실속보다 말빨 등 겉만 부각되는 '감각 의존 선거'가 될 여지도 있고, 군소 후보들에 대한 푸대접 문제까지도 거론됐다. 15대 대선 들어서는 'TV 정치'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줬는데, 김대중-이회창-이인제 3파전 토론은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공정히 진행됐다. 비록 정책 토론보다 상대 약점 물고 늘어지기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중요 쟁점문제들이 대다수 거론되어 후보자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러한 TV 정치시대 개막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정치진출이 전보다 더 늘어났는데, 신영균, 최희준, 변웅전, 이주일, 정동영, 변웅전, 이윤성 등 대스타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대다수 국회에 진출했다. 낙선자까지 포함한다면 정계진출을 시도한 연예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