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대 (문단 편집) === 스포츠 === 이 시대 한국에서 가장 성과가 있는 건 뭐니뭐니해도 '스포츠'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이미 스포츠 강국이었고, 1990년대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여 마라톤과 프로야구, 월드컵에서 각각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줬다. 당대 마라톤에선 단연 돋보이는 아이콘이 '[[황영조]]'와 '[[이봉주]]'인데, 그 둘은 동갑내기에 명성 있는 '코오롱 사단'의 일원이었다. 황영조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 마라톤 역사상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 손기정 때 '일장기의 한'을 풂과 동시에 '몬주익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후 부상에 시달리다가 1994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9초로 한국 최고기록을 달성해 재기했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남자부에서도 일본의 하야타 토시유키를 제쳐 2시간 11분 13초로 4년 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김원탁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국내 선발전에서 부진하여 예비선수로 선출됐고,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봉주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스페인 선수 마르틴 피스에게 2위로 은메달을 땄음에도 '포스트 황영조'로 등극했으며, 12월 1일 일본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불굴의 투지로 스페인의 알베르토 후스타도를 4초 차로 제쳐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서 스타가 됐다. 1998년 4월 19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로 8분대를 깨서 황영조의 기록까지 뛰어넘었지만, 성적은 스페인의 론세로에 이은 2위였다. 그가 이렇게 한국 최고의 마라토너로 등극한 건 가난한 생활환경과 짝발이란 핸디캡, 정봉수 감독의 독사같은 지옥훈련을 견뎌내는 성실함이 한몫을 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1990 이탈리아, 1994 미국, 1998 프랑스까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회 연속 진출이란 경이로운 기록을 보여줬는데, 특히 1993년에 열린 미국 월드컵 예선에선 일본에게 밀리다가 이라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월드컵 티켓을 따내기도 했고,(도하의 기적) 본선에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스페인과 볼리비아를 상대로 끈질기게 버텨 2무를 기록했고, 댈러스에서 열린 독일전에선 무더위 속에서도 상대 독일을 궁지에 몰아넣는 듯했으나 아쉽게 2-3으로 져서 16강을 못 갔다. 1997년 IMF 한파 속에 열린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전에서도 아시아 국가들 중 1등으로 또 월드컵 티켓을 따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고, 당시 팀을 지휘한 차범근 감독은 전 국민의 영웅이 되어 방송과 광고 섭외가 늘었고, 국대 선수들과 응원단 '붉은악마' 멤버들이 입은 유니폼도 많이 팔렸다. 그러나 본선에선 멕시코전 때 하석주의 백태클로 1-3으로 졌고, 네덜란드에도 0-5로 지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 국민의 분노를 사 차범근 감독이 쫓겨났고,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이임생의 부상투혼으로 최선을 다했으나 1-1로 패해 16강을 또 못 갔다. 그 외에 국민적 관심을 모은 건 박찬호와 선동열, 이종범 등 프로야구 선수들의 해외진출이었다. 이중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은 1996 시즌 때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료 3억엔 및 연봉 1억 5천만엔으로 이적해 순수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초반에 고전하다 1997년 시즌 때 1승 38세이브로 포텐이 터져 '나고야의 태양'으로 등극했다. 이적 당시 엄청난 연봉과 이적료 외에도 시즌당 25세이브포인트에 2천만엔, 40세이브포인트에 5천만엔 등 별도 상여금을 지불하는 조건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1997년 당시 전 야구팬들의 관심은 한국프로야구보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활약에 더 쏠렸다.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초기에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등 무명시절을 보내다 1996 시즌엔 다저스 주전 자리에 처음으로 올랐고, 1997 시즌에 선발투수로서 14승을 달성해 '코리안 특급'이란 별칭이 붙어 수많은 방송과 광고에 출연하는 등 '국민의 우상'으로 등극했다. 해태 선수 이종범도 1998년에 선배 선동열을 따라 주니치로 갔다. 농구에선 NBA 열풍,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인기폭증 등으로 인해 저변이 더욱 높아졌으며, 이것은 1997년 프로농구 출범에 자양분이 됐다. 실업에선 '허동택 트리오'를 앞세운 기아 농구단이 현대-삼성 양강 틀을 깨며 1988/89 시즌 첫 우승 이래 1992/93 시즌까지 5연속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뤘고, 1994/95 및 1995/96 시즌 두 차례 연속 우승을 이루며 농구대잔치 최다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뒤이어 프로농구 출범 후 1997 시즌 및 1997/98 시즌 두 차례 우승을 이뤄 90년대 농구판을 장식했다. 대학농구 역시 형님뻘인 실업농구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날을 매섭게 세운 연세대 농구부가 문경은-우지원-김훈-석주일-이상민-서장훈 라인업으로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상무를 꺾어 대학팀으로서 최초로 우승을 달성했고, 라이벌 고려대도 전희철-김병철-신기성-양희승-현주엽 라인업으로 1994/95 시즌 대학농구판에서 연세대를 앞지르고 1995/96 시즌에는 제1~2차 대학농구연맹전, MBC배, SBS배 고교대학농구최강전까지 석권해 대학농구판 그랜드슬램을 따냈다. 이들의 인기 덕에 여학생들은 콘서트장 외에도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선수들을 보려고 농구장으로 찾아갔다. 남자배구에선 1991년 한양대, 1992년 상무의 대통령배 우승을 빼곤 1995/96 시즌까지 고려증권-현대자동차써비스 일색이었는데, 현대차는 마낙길, 하종화, 강성형, 박종찬, 임도헌 등 스타들이 포진한 반면, 고려증권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지원 속에서도 이성희, 박삼용, 이수동 등을 중심으로 조직력 배구를 구사했다. 그러다가 1996/97 시즌부터 김세진과 신진식이 이끄는 신생팀 삼성화재가 슈퍼리그를 우승하며 양강체제를 뚫어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여자부에선 이도희, 장윤희, 정선희, 홍지연, 박수정 등이 이끄는 호남정유 여자배구단이 1991~1999년까지 9연속 대통령배-슈퍼리그 우승을 이뤄 현대와 미도파 양강체제를 종식시켰으며, 스쿼드 중 대다수가 국대에 차출돼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일본을 꺾어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외 종목에서도 대한 건아들의 활약은 더 두드러졌다. 탁구선수 현정화가 1993년 5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제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탁구사상 최초로 여자개인 단식 금메달을 땄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선 금63, 은53, 동63개로 2위를,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금7, 은15, 동 5개로 10위를 각각 기록했다. 또 특기할 만한 점은 남북한 체육교류가 전보다 더욱 활성화됐다는 점인데, 1990년엔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리고 1991년 4월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분단 이래 처음으로 남북 양측이 단일 선수단을 꾸려 출전했으며 6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에 제1차 연평해전 등 어수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8월에는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9월과 12월엔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통일농구대회가 열렸다. 정책적 측면에선 '탈 엘리트 체육'의 모습이 보인 때이기도 했다. 노태우 때까지만 해도 엘리트 중심이었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엘리트 체육 일색에 대해 반성하자는 움직임이 보여 생활체육의 필요성이 증대됐고, 김영삼 대통령은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를 합쳐 '문화체육부'로 출범시키고 '국민체육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생활체육 육성에 힘썼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전 방문을 빼곤 태릉선수촌 방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스포츠 외교에도 힘을 기울여 1996년에는 2002 월드컵의 한국-일본 공동유치를 성사시켰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문화체육부가 '문화관광부'로 바뀌면서 '체육'이 빠졌고, 체육 관련 부서도 2개에서 1개로 축소됐다. 거기에 전년도부터 제7차 교육과정이 시행된 뒤 체육수업 시수도 줄어 청소년의 체력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김대중 정부 정책자문위원을 했던 박세호 전 대한배구연맹 사무총장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80295|증언에 따르면]] 박찬호나 박세리가 성과를 거둬도 김대중 대통령은 축전을 안 보냈고, 오히려 뒤늦게 훈장을 주거나 국무총리를 시켜 포상을 하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로 체육에 무관심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