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2000년대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음악 ==== 2000년 당시 대중음악의 아이콘은 조성모의 독주, 서태지 컴백, 일본 대중음악 3차 개방, 중국행 한류열풍 등이었다. 조성모가 9월에 낸 <아시나요>가 190만 장, 이에 앞선 리메이크 앨범 <가시나무>가 165만 장을 각각 기록해 독주해왔고, 4년여간 은둔해 온 '문화대통령' 서태지도 그해 8월 29일 철통같은 경비 속에서 귀국해 9월 초에 정규 6집을 냈다. 반면 로 인기를 얻은 백지영의 비디오 사건으로 인터넷 사생활 침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클론과 안재욱, [[NRG(아이돌)|NRG]], [[H.O.T.]]도 전년도 홍콩 및 대만에 이어 중국에도 진출해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에는 음반판매의 부진으로 침체기를 보여줬는데, 기존 음반시장이 쇠퇴한 대신 mp3 등 디지털 음악시장이 더욱 활성화됐다. god, 조성모, 김건모, 브라운아이즈, 쿨, 왁스 등이 나름 활약했고, 장르 중에서 R&B가 약진했다. 그 와중에 MBC <시사매거진 2580>이 '연예계 노예계약' 파문을 보도하자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소속 회원들이 MBC 출연을 거부했고, 걸프렌드의 대리녹음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성행하던 립싱크에도 메스가 가해져 MBC <생방송 음악캠프>가 올라이브 무대로 전환했으며 타 방송사 음악프로들도 라이브 비율을 늘렸다. 2002년 한 해 동안 국내 음반시장은 침체기였다. 홍보비 파문에 따른 검찰 수사와 소리바다 파장 등이 일면서 전체 음반시장 규모가 줄어버린 데다가, 전년도만 해도 밀리언셀러가 3개나 되었으나 당년도에는 쿨의 정규 7집이 65만장을 기록한 게 최고 기록이다. jtL, 코요태, 장나라, 보아, 성시경, 왁스, 윤도현, 신승훈, 이수영, S.E.S., 자우림 등이 40만장 이상을 기록했다. 다만 해외 음반시장에선 일본 시장을 노린 보아가 그해 3월 정규앨범을 처음 발매해 일본 음반판매 1위를 기록해 승전보를 울렸다. 반면 [[신화]]는 싱가포르, 조성우는 미국, 윤미래는 일본 등지에 각각 진출했다. 또한 중국 인민라디오방송(CNR)과 일본 스카이퍼펙 TV 등지에서 한국가요 전문 프로그램이 전파를 탈 정도로 한국 가요의 위상이 드높아졌다. 2003년에도 가요계는 여전히 불황이었다. 당시 음반시장에서 김건모 8집이 52만장으로 최고치였고, 그 뒤는 이수영 5집(42만 5천장), 조성모 5집(39만 8천장), 휘성 2집(36만 8천장)이 각각 뒤따랐다. 음반업계의 불황에 따라 온라인 음악사이트에 대한 저작권 관련 법적대응이 두드러졌는데, 법원의 판결은 음반업계에 유리했음에도 해결책은 없었다. 같은 시기 아이돌 멤버들의 솔로 전향과 연기자 전업이 전보다 더 두드러졌는데, S.E.S. 멤버 전원이 솔로로 전향하는가 하면 핑클, 신화 등지 멤버들도 개인활동을 했는데, 특히 이들 중에는 이효리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솔로로 우뚝 섰다. 발라드 가수 이수영이 앨범 2장으로 66만장을 팔아 개인 판매량 1위를 기록했으며, 보아도 한일 양국을 왕복하며 가교 역할을 했다. 또 김건모, 세븐, 조성모, 빅마마, 휘성 등도 최선을 다해 활약했다. '가왕' 조용필도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어 매진을 달성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4년에도 대중가요 음반 중 50만장을 기록한 게 하나도 없었다. 서태지 7집이 48만 2,066장으로 최고를 기록했고, 이수영의 리메이크 앨범인 5.5집 <클래식>이 38만 868장으로 2위, 이승철 7집도 35만 2,323장으로 3위를 각각 찍었다. 유명 음원사이트 벅스와 한국음반제작자협회 양측은 음원을 유료화하기로 합의했고, 소리바다도 2005년까지 유료화하는 데 합의했다. 같은 시기 국내 가요계에선 '7080 열풍'과 함께 기존 히트곡들의 리메이크 열풍도 같이 불었는데, KBS1 <열린음악회> 1월 25일자 방송분 '7080 추억의 그룹사운드' 및 3월 2일 방송분 '7080 보고싶다'가 각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해당 에피소드 2편은 DVD로 발매되기도 했다. 2005년 1월 저작권법 개정에 따라 음원의 유료화 움직임이 점진적으로 진행돼 가요시장이 회생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음원의 불법 사용에 대한 저작권단체의 법적 소송, 이동통신사의 온라인 유료 음악시장 가세 등으로 온라인 음원시장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이동통신사들도 온라인 음원의 중요성을 깨달아 음악펀드를 조성했고, 이 자금이 가요계에 유입돼 신인과 기성 가수들의 음반이 쏟아졌다. 해외에선 비, 세븐, [[장나라]] 등이 아시아의 스타로 거듭났고, 국내 무대에선 SG워너비, 버즈, 김종국 등 발라드 가수들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윤도현, 조성모, [[테이]], [[신혜성]], 휘성 등도 같이 최선을 다했다. 전년도에 장윤정이 트로트곡 <어머나>로 스타가 된 걸 계기로 한물갈 줄 알았던 트로트도 경쟁력을 다시금 얻었고, 이루 같은 신인들도 트로트 시장에 대거 뛰어들었다. 2006년 가요계에선 발라드 편중 현상이 일어났는데, 백지영의 <사랑 안해>를 시초로 발라드 곡이 대거 쏟아졌으며 손호영, 김태우 등 아이돌 출신 솔로들도 맹활약했다. 10~11월에 걸쳐 비, 세븐, 동방신기, 신승훈 등 톱가수 수십 명이 음반을 내 '별들의 전쟁'이 터졌다. 이와 더불어 음반에서 음원으로 산업 구조가 전환돼 CD가 아니라 디지털 싱글로 신곡을 내는 사례가 많았다. 그에 따라 CJ뮤직, SK텔레콤, KTF 등이 온라인 음악시장에 뛰어들어 디지털 음악시장이 3천억원 규모를 뛰어넘었다. 반면 음반시장은 갈수록 쇠퇴해 동방신기 3집이 34만 9,317장, SG워너비 3집이 31만 1,642장으로 30만을 겨우 넘었고, 이수영 7집 및 신화 8집이 20만장을 넘었다. 같은 시기 가수 비가 미국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동양인 가수로서 최초로 단독 공연을 열었으며, 그해 5월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박진영도 미국 뉴욕에 체류하며 아시아를 넘어 팝의 본고장에 진출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2007년 가요계에선 판매량 20만장을 찍은 음반이 한 개도 없는 반면, 디지털 싱글이나 싱글/미니음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장르별로는 빅뱅과 원더걸스 등 아이돌 세대가 대세를 이뤘고, 박진영, 윤상, 토이 등 X세대의 우상들이 컴백해 건재를 과시했다. '문화대통령' 서태지도 데뷔 15주년을 맞아 라지 피자박스 크기의 CD 10장짜리 기념 앨범을 내 광속 매진을 기록했으며, 매진 후 옥션 같은 경매사이트에서 몇십, 몇백만 원까지 부를 정도로 희소가치를 기록했다. 또 하반기 들어서 원더걸스의 '텔미춤'이 국민 응원춤으로 격상했다. 이는 미국에서 음반작업을 하던 박진영이 원더걸스에게 보낸 '원격 안무지도' 동영상이 기폭제가 돼 폭발적 인기를 불러왔다. 2008년에는 아이돌 홍수 속에서도 서태지가 4년 만에 컴백하며 등 싱글 2장을 내 폭발적 인기를 불러와 이듬해까지 '서태지 신드롬'은 식지 않았고, 신승훈도 2년만에 프로젝트 앨범 를 내 건재함을 과시했다. 원더걸스는 과 가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으로 메가 히트를 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비의 , 동방신기의 <주문 - MIROTIC> 등 일부 곡이 선정성을 이유로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았고, N.EX.T의 <아! 개한민국>, 마이티마우스의 <꽐라송>, 엄정화의 등 많은 노래들이 무더기로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주 고객인 청소년과 음반사들이 성토했고, 표현의 자유 논쟁도 또다시 불거졌다. 상반기부터 원로가수 나훈아의 야쿠자 신체훼손 루머가 퍼진 데다 락 밴드 '산울림'의 드러머이자 막내동생 김창익을 비롯해 먼데이키즈 멤버 김민수, 거북이 메인보컬 터틀맨, 엠스트리트 멤버 이서현, 승무원 출신 가수 이라 등의 안타까운 사망 등 안 좋은 이슈들이 많았다. 2009년 가요계는 이전의 2007년~2008년의 발라드와 아이돌 과도기가 끝나고 소녀시대, 투애니원, 브라운 아이드 걸스, 2PM, 티아라, 카라 등의 본격적 2차 아이돌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Gee]], [[소원을 말해봐]], [[I Don't Care(2NE1)|I Don't Care]], [[Fire(2NE1)|Fire]], [[Abracadabra(브라운아이드걸스)|Abracadabra]], [[Sorry, Sorry]], [[Again & Again]], [[1:59PM#s-3.2|Heartbeat]], [[TTL (Time To Love)]], [[Absolute First Album#Bo Peep Bo Peep|Bo Peep Bo Peep]], [[미스터(카라)|미스터]] 등의 굵직한 아이돌 히트곡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다른 한편 안 좋은 일들도 많았는데, 디지털 음악시장의 활성화로 싱어송라이터가 몰락했으며 막 솔로로 데뷔한 [[G-DRAGON]]의 표절 논란도 있었고 [[2PM]] 멤버 [[박재범|재범]]의 탈퇴 파동도 있었다. 동방신기도 멤버들 간의 불화가 터져 믹키유천 등 멤버 3명이 'JYJ'로 홀로서기를 했다. 아이돌의 세대교체도 이 때부터 일어났는데, [[2002년]]을 끝으로[*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H.O.T.는 [[2001년]] [[2월]] 해체, 젝스키스 [[2000년]] [[5월]] 해체했다. 1세대 걸그룹으로 불리는 핑클과 S.E.S의 경우 S.E.S는 [[2002년]] [[12월 19일]] 해체했고, 핑클은 공식 해체는 하지 않았지만 [[2002년]] 이후 완전체로서의 활동이 전무해 사실상 해체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1세대 아이돌들이 물러가게 되었고 한동안 공백 상태이던 가요계를 [[브라운 아이즈]]를 시작으로 [[SG워너비]], [[플라이 투 더 스카이]], [[테이]], [[씨야]] 등의 미디엄 템포 발라드[* 소위 소몰이창법으로 유명한 R&B 색깔이 가미된 웅장한 발라드], [[버즈(한국 밴드)|버즈]]를 위시로 한 [[비주얼계]] [[록발라드|락발라드]] 장르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세대 아이돌 그룹들은 해체 또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2000년대 초반은 여자 솔로 가수들의 전성기였으며 [[장나라]], [[보아]], [[이효리]], [[이수영(가수)|이수영]] 등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그나마 남자 솔로 가수는 [[비(연예인)|비]]와 남자 아이돌들은 [[동방신기]], [[SUPER JUNIOR|슈퍼주니어]], [[SS501(아이돌)|SS501]] 등이 데뷔하면서 큰 인기를 얻고 명맥을 이어갔지만 이 시기에 걸그룹 시장은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게 [[쥬얼리]] 정도이며 아이돌 공장이라 불리우는 SM 엔터테인먼트마저 걸그룹 히트에 연달아 실패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열풍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2017년 히든싱어, 슈가맨 등의 프로그램으로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 같은 추억보정을 얻고 있지만 [[소몰이창법]]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가요계는 식상하다, 감정을 낭비한다 등의 지탄을 받고 있었고 매 곡마다 짜는 듯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귀도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2000년대 초반 이후, 음반 시장은 몰락한 가운데 아직까지 음원 시장이 제대로 커지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시장성에 있어서도 크게 위축되었던 암흑기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던 2007년, 상반기엔 [[아이비(가수)|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가 포문을 열었고, 이어서 나온 [[원더걸스]]의 [[Tell Me]]가 엄청난 반응과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제2세대 아이돌 시대를 열게 되며 이후 [[BIGBANG|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등의 2세대 아이돌들이 미디엄 템포 발라드, 락발라드 가수들을 대체하면서 소녀시대, 투애니원, 브라운 아이드 걸스, 2PM, 티아라, 미쓰에이, 카라 등의 본격적인 2차 아이돌 전성시대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2007년]] ~ [[2008년]]'''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요계의 색채가 다양했던 시기인데 바로 소몰이 창법과 발라드의 마지막 전성기와 2세대 아이돌의 시작점이 교차하던 과도기여서 음악장르가 다양했었다. 원더걸스는 , , 등의 공전의 3연타를 기록하며 2세대 아이돌의 시작을 알렸고, 발라드 쪽에서는 소몰이 창법이 마지막 불꽃을 자랑하며 아이돌과 발라드가 공존하며 음악장르가 다양했다. 이렇듯 2007년~2008년 시기에는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가 1위를 양분했지만 소녀시대 Gee 열풍 이후인 [[2009년]]부터 발라드의 쇠락과 아이돌 후크송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발라드가 아이돌에게 완전히 자리를 내어주고 현재의 가요계 구도가 자리잡혔다. Gee 이후로는 이전의 발라드가 예전같은 위풍을 자랑하지 못하게 되고 현재같은 본격적인 아이돌 전성시대가 시작하게 된다. [[인디 음악]]계는 그야말로 흥망성쇠를 거듭한 시기로, 한창 성장하고 있던 시기에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카우치 사건]]으로 한번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2000년대 후반 들어 [[장기하와 얼굴들]] 등 2세대 그룹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인디 신 자체를 부활시키기 시작하였다. 민중가요계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운동권의 몰락으로 침체기에 빠졌는데, 대다수 대학 노래패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해산하거나 대중가요를 부르는 밴드가 됐으며 '조국과 청춘'과 '천리마' 등은 활동을 중단하거나 해산하기도 했다. 다만 1999년에 한선희, 백자, 강상구 등이 결성한 '우리나라'와 남총련 노래단 '한반도'가 이 시기 집회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꽃다지와 소리타래, 희망새 등도 건재를 과시했다. 윤민석이 2002년에 지은 가 당대 반미 열풍을 타고 빠르게 유명세를 탔고, 2005년에 박성철이 짓고 부른 <맥아더>도 인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논쟁과 맞물려 파장이 일었다. 심지어 피엘송닷컴, 밥자유평등평화, 송앤라이프 등 인터넷 민중가요 사이트들도 생겨 중년이 된 386 세대들의 향수를 자극시켰다. 그동안 동요로 취급받으며 찬밥신세가 된 애니송 분야도 서서히 '대중가요'의 범주에 들기 시작했는데, 온미디어 공채 5기 성우 [[이용신]]이 <달빛천사>, <캐릭캐릭 체인지> 등지의 주제곡을 불러 '한국의 미즈키 나나'로 등극했고, 유정석이 부른 <쾌걸 근육맨 2세> 주제곡 '질풍가도'도 2000년대 후반 야구장 등지에서 응원곡으로 널리 불리며 재조명되었으며 2007년 SBS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박신양이 <파워레인저 매직포스> 주제곡을 불러 화제가 되었다. 버즈나 동방신기, SS501, 이수영, 이소은, 쥬얼리, 파란 등 대중가수들도 전과 달리 애니송 시장에 활발히 뛰어들었다.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 전까지 간헐적으로 시도해 본 남북한 음악교류도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1999년 12월에 열린 '2000년 평화친선음악회'에 이어 2003년에 KBS1 가요경연프로 <전국 노래자랑>이 '평양 노래자랑'이란 명칭으로 북한 평양에서 최초로 현지 녹화방영되었으며, 2005년에 조용필 콘서트가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려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수립 후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한동안 음악교류가 끊겼다. 반면 2000년에 배우 길정화가 '통일소녀'란 예명으로 <휘파람>을 불러 '미지의 영역'이던 북한 노래에 대한 관심이 한때나마 형성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한국 음반시장은 [[카세트테이프]]와 [[CD]]음반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소리바다]]와 [[프루나]], [[eDonkey|당나귀]]로 대표되는 불법 [[P2P]] 프로그램이 성황을 이루던 2000년대의 타격과 연이은 [[아이리버]], [[코원]], [[YEPP]], [[iPod]] 등 [[MP3 플레이어]]의 공격으로, 2000년대 들어서 카세트테이프는 물론 CD로 음악 듣는 시대는 사실상 끝이 난다. 물론 [[2020년대]] 초반인 지금도 CD 판매고를 차트 산정의 주요 척도로써 인정하고는 있지만, [[1990년대]]의 판매량에 비하면 무시해도 될 수준인 경우가 많고, 몇몇 아이돌 그룹이 기록하는 음반 판매량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해당 그룹의 차트 순위를 높이기 위한 팬들의 화력지원일 뿐, 실질적으로 CD로 음악을 듣는 팬들은 몇몇 마니아들을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팬들 입장에서는 음원 판매량도 음반 판매량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까닭에, 어차피 CD를 샀더라도 음원을 구입하게 되므로 굳이 귀한 CD를 개봉하여 상품성을 낮추느니 음원으로 듣는 게 훨씬 속 편하기도 하기 때문. 따라서 음반 제작사에서는 음반을 구매한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각종 특전(예를 들어 화보사진 카드나 보너스 트랙 같은)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200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