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2004년 (문단 편집) === 고속철도 시대의 개막 === ||[youtube(myuPDi-dHt4)]|| [[파일:2004년 4월 1일 KTX 개통 포스터.png|width=246]] || || 3월 30일[br]MBC 뉴스데스크 || 고속철도 개통 포스터 ||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되면서 대한민국은 고속철도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동시에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고속철도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또, 당시 기준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빠른 고속철도에 이름을 올렸다.[* 첫 번째는 일본, 두 번째는 프랑스이다.] [[1992년]] [[6월 30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경부 고속철도가 끝내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고속철도 공사가 막 시작된 당시에는 1998년 말 또는 1999년 초에 완공해서 고속철도를 타고 새천년을 맞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열차 한 편성에 1천 명의 승객을 싣고 서울-대전 간을 38분 그리고 서울-부산 간은 1시간 40분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큰 금액의 공사비 조달 방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소음과 진동 등 공해처리 문제, 그리고 서울 역사와 대전 역사의 위치 선정에 따른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시민 단체와의 갈등 등 갖가지 문제가 발생해 사실상 1994년까지는 고속철도 공사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예산안 조정과 시민 단체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 마련 그리고 고속철도 운행 노선 계획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1995년 3월부터 경부고속철도를 지하화하는 방안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고, 설계 변경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공사가 다시 재개되는 듯 했으나 건설교통부 내에서 일어난 의견 마찰로 재개는 얼마 가지 못해 고속철도 개통이 2년 늦어져 2000년 또는 2001년으로 완공 시기가 미루어졌다. 드디어 1996년 12월, 건설교통부가 고속철도 차량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현재 KTX에 쓰이고 있는 프랑스의 '''TGV 차량'''이다.[* 여담으로 이 때 우리나라가 프랑스의 고속철 차량을 구입하는 조건으로 병인양요 때 뺏어간 외규장각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1998년에 갑작스러운 IMF 외환위기 여파로 1차 고속철도 개통 시기를 '''2004년'''으로 늦추고, 2차 개통은 2006년에 하기로 결정했다.[* 1차 개통 예상 시기는 적중했으나 2차 개통은 조금 더 늦어져 2010년에야 이루어졌다.] 이후 1999년에는 한국의 고속철도 이름을 '''KTX'''로 결정하였다. 이 해 [[4월 1일]],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고속철도가 12년이라는 긴 시간과 13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은 끝에 마침내 개통되었다. 개통일 새벽 4시 반, 밤새 정비를 마친 첫 고속열차가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떠났는데, 그 날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첫 고속철을 타기 위해 일부러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선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이 때 놀라운 점은 이 해 4월 1일은 주말도 아니고, 목요일이었을 뿐더러 새벽 4시 반이면 굉장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야 할 시각이기에 시민들의 고속철도에 대한 기대감은 굉장히 높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KTX 개통 이틀 째를 맞는 [[4월 2일]]에는 고속철도 관련 사건사고가 연달아 발생했다. 먼저,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고속철도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던 40대 남성이 허술한 응급체계에 의해 주변 병원까지 옮겨지는 데 한참이나 걸려서 결국 숨지는가 하면 까치집이나 이물질 등으로 고속철이 멈춰서 운행에 차질을 빚었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은 KTX의 비용이 너무 비싸서 이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던가 또는 굳이 비행기가 있는데 뭣하러 고속철도를 이용하냐는 등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고속철도가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화되는 것에 가중 시킬 수 있다던가 또 환승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 잘 운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아 전날보다 평가가 좋지 않았다. 한편 KTX가 개통되면서 기존에 운행된 열차들은 모두 큰 후폭풍을 맞았다. 먼저, [[통일호]]의 경우 객차 내구연한이 도달하여 CDC형 동차를 제외한 객차형 통일호가 폐지되었고, 남은 CDC형 동차의 경우 통일호 이름을 버리고 [[통근열차(한국의 열차등급)|통근열차]]라는 새 열차 체제로 개편되었다.[* 통근열차는 기존 통일호가 운영했던 구간에 투입되어 운영되다가 2021년 현재는 [[광주선]]([[광주송정역|광주송정]] - [[광주역|광주]])에만 운영중이다.] [[무궁화호]]는 기존 통일호의 위치였던 완행열차의 자리로 내려앉았고 1975년부터 이 해 3월까지 특급열차로 불리며 군림하던 [[새마을호]]는 무궁화호 급으로 격하되어 기존의 위상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렸다. 당시 철도청은 KTX 개통 이후 새마을호를 무궁화호 급으로 격하시키는 과정에서 정차역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편수를 감편하는 등 전면적으로 새마을호의 위상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했었다. 또한 고급 서비스로 유명했던 새마을호의 서비스, [[식당차]]의 퀄리티 역시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새마을호를 KTX 셔틀열차로 굴리기도 했다. 역사 역시 KTX 개통을 앞두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중심 역이라 할 수 있는 [[서울역]]은 KTX 개통을 앞두고 1925년부터 2003년까지 78년을 사용했던 구 역사를 뒤로하고 2004년 1월에 문을 연 신 역사로 주 기능을 옮겼고, KTX 개통으로 호남선 출발역으로 선정된 [[용산역]]은[* 2003년까지만 해도 통일호나 일부 완행 무궁화호나 정차하던 간이역이었다.] 기존의 낡고 비좁은 역사를 철거하고 종합쇼핑센터가 입주한 대규모의 민자역사를 완공했다. 그러나 KTX가 개통된 원년답게 지금과는 여러모로 괴리가 느껴지는데, 대표적으로 KTX 객차 내부에 있는 모니터가 LCD가 아니라 CRT가 쓰였다는 점이다. KTX 객차 내부의 LCD 모니터는 2005년 1월에 [[대한민국 철도청]]이 [[한국철도공사]]로 승격됨과 동시에 교체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지하철 역사 내부의 플랩식 안내판이 주류를 차지하던 시기였다.[* KTX가 정차하는 역들 가운데 플랩식 안내판을 제거한 곳도 있지만, 일부는 유지하는 곳도 존재했다. 또, LCD 안내판의 경우 2008년 초부터 보급된 바 있다. [[http://www.sptoday.com/bbs/board.php?bo_table=article&wr_id=43179&page=8&p=1|#]]] 이외에도 지하철 전면부의 롤지가[* 2005년까지 쓰인 후 2006년에 모두 LED로 변경되었다] 쓰였으며, 철도청의 역삼각 로고가 담긴 역명판이 일부 역에서 쓰이던 마지막 시기였다.[* 모든 역의 역명판을 한번에 교체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부담이 컸으므로 2005년 철도공사 출범에 맞춰 새로운 역명판으로 교체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j10913&logNo=50000681380|동인천역]], [[https://m.blog.naver.com/digmon2001/220840496398|의정부 북부역]], [[https://m.blog.naver.com/digmon2001/220840496398|대성리역]], [[https://m.blog.naver.com/digmon2001/220840496398|금정역]] 등]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KT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