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00(영화) (문단 편집) == 철수 후 실제 역사 == 영화에도 잠깐 나왔고, 원래 영미 조계를 통해 중화민국 통치지역으로 병력들이 이동했어야 했지만, 영국이 중국군을 놓아주면 조계를 친다는 일본의 협박에 철수한 병력들을 비무장화시킨 뒤에 감금했다. 그나마 조계 내 중국인들이 감금된 군인들을 후원해서 좀 나아졌지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본격화된 1941년에 일본군이 상하이 전체를 점령하자 이들 대부분은 강제노역에 투입되었고 몇몇은 총살당했다. 셰진위안은 [[왕징웨이 정권]]으로 부터 전향 요구를 줄기차게 받았지만 거절한 뒤 1941년에 암살당한다. 그리고 전향서를 쓰지않은 장병들은 남양군도로 강제로 징용됐고, 전후 약 100명 정도만이 생존하게 된다. 생존자 중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지만 상당 수는 중국 대륙에 남아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박해의 이유는 88사단이 장제스 직계사단으로, 장제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던 친위부대였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항목에도 있듯이, 당시는 광기의 시대로 마오쩌둥과 그에 관련되지 않으면 [[홍위병]]들이 모조리 파괴하고 박해하던 시대로, 참전용사였어도 '''국민당군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탄압받았고 셰진위안의 묘소도 파헤쳐졌다고 한다. 후에 잠잠해진 뒤 다시 제대로 이장되었긴 하지만.] 다만 1980년대 이래 중일전쟁 당시의 국민당군의 기여가 재평가됨에 따라서 이들도 점점 대륙에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대만에선 최후까지 생존했던 참전용사 리딩신은 2013년 92세로 사망했으며, 대륙에선 최후까지 생존한 참전용사인 양양정은 2010년 96세로 사망했다. 사행창고 자체는 일본군 치하, 국공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풍파를 거쳤어도 보존됐고 1985년에 유적지로 지정된다. 현재, 과거 영미조계지는 약간의 빈티지한 건물들을 제외하면 모두 재개발되어 현대화되었다. [[동방명주]]를 비롯한 상하이의 화려한 마천루들 사이에서, 창고는 원형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대만]]의 [[마잉주]] 정부는 2009년 남양군도에 파견되었다가 사망한 참전자들을 기리는 비석을 현지에 세웠고, 2010년 [[중국]]도 참전자를 기리는 기념비와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무적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중일전쟁 초반의 [[중화민국|중국]]의 항전의지를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달 후 벌어진 [[난징 전투]]와 6개월후 벌어진 우한 전투에서 중국군은 상하이에서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참패하고 국민정부는 장강 상류인 [[충칭시]]까지 물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