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AKB48/역사 (문단 편집) === 2005년: 출발, 그리고 팀A의 등장 === 2005년 7월, [[아키모토 야스시]]의 주도로 '아키하바라48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AKB48'이 아닌 '아키하바라48'이라는 가칭으로 불렸다. 전용 극장 부지로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이 선정된 것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토가사키의 회고에 따르면, 아키모토로부터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쇼 펍(우리나라로 치면 나이트클럽 비슷한 곳)'을 만드는 줄 알고 자원했고, 실제로 기획서도 돈페리 등을 얼마로 할지에 대한 내용으로 보냈다고 한다. 사실 전용 극장 부지로 아키하바라의 돈키호테가 선정된 것도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어떤 부동산을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도 수상한 시선밖에 못 받았다고 한다.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거라고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사진 단 하나 뿐이었지만, 그걸 내밀어봐도 본인이 직접 오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고. 한참을 돌아다니던 끝에 때마침 빈 공간이었던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을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1기생 오디션에 참가한 것은 7,924명이었는데, 이 중 서류 심사를 통과한 45명을 대상으로 10월 30일 최종 심사를 진행하였다.[* [[http://ameblo.jp/akihabara48/entry-10005678037.html|오디션 상세]] - AKB48 공식 블로그] 이 최종 심사를 통해 24명의 합격자가 추려졌고, 그 이후 극장 공연 시작을 목표로 가창과 안무 훈련에 돌입하였다. 11월 1일부터 훈련에 돌입했는데, 당시 훈련 지도를 맡은 것은 [[모닝구 무스메]]의 안무가로 유명한 나쓰 마유미였다. 12월 1일 극장공연 개연을 목표로 1개월간 나쓰 선생으로부터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24명 중 네 명이 탈락하였다. 탈락자 중에는 첫날 안무 연습에 지각했다는 이유로 나쓰 마유미가 직접 "제명 조치"를 한 사람도 있었다. 남은 20명은 11월 23일부터 전용 극장의 스테이지에서 실제 공연을 앞둔 연습을 이어나갔다. 12월 8일, 1기생의 첫 공연인 'PARTY가 시작된다구' 극장 공연이 초연되었다. 원래는 12월 1일에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나쓰 마유미가 이대로는 실력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일주일 미룬 것이었다.[* [[http://ameblo.jp/akihabara48/entry-10005708848.html|이번 달도]] - AKB48 공식 블로그] 첫 공연에는 72명이 몰렸으나 극장 관계자와 연예부 기자들을 빼고 실제로 돈을 내고 들어온 관객은 7명에 불과했다. 당시 영상자료를 보면, 실제로 온 관객들은 중앙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있고, 업계 관계자들은 서있거나 카메라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히 빈 자리가 훨씬 많은 상황. 공연이 끝나고 난 뒤의 멤버들은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5년 겨울의 AKB48은 말 그대로 '지하의 아이돌'의 표본이었다. 첫 날 관객은 극장 관계자를 빼면 일곱 명 뿐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관객이 들어차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1000엔짜리 티켓을 거리에 나가 무료로 나누어줘도 관객수가 한 자릿수인 날이 허다했고, 심지어 크리스마스 기념 공연을 선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 팜플렛도 돌려봤지만 관객이 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고 한다. [[이타노 토모미]]는 "저는 끝자리에 있었으니까 제가 서있는 자리에서는 관객이 한 분도 보이지 않았어요. 안무 중에서 손을 흔드는 동작이 있는데, 아무도 없는 자리를 향해서 손을 흔드는 게 정말 싫었어요. 언제쯤 되어야 저 자리에 관객이 앉아있고 내가 손을 흔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아요."라고 이때를 회상했다. 이 시기에는 모두들 고생을 많이 하였다. 멤버들은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를 하였다. 이 때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이나, 면전에서 전단지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토가사키 토모노부]] 지배인 역시 길거리 홍보를 하였는데, 메이드 카페에 놀러온 학생을 붙잡고 '더 재미있는 거 소개시켜줄게'라며 극장으로 안내한 적도 있다고 한다. 너무나도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황당한 기획도 많이 했다. 이를테면 토, 일요일 공연은 총 3회, 6시간 있었는데, 당연히 관객이 없는데도 공연을 치루는 날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응원을 가장 열심히 한 팬에게 MVP라 해서 AKB티셔츠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했지만, 팬들의 항의로 불과 하루만에 중단되어버렸다고. 이때 당시만 해도 운영은 1군, 2군으로 나누어 활동하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팬들에게서 그날그날 좋았던 멤버에 대해 앙케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 그 앙케트에 당시 1기생 오디션에 탈락한 후 카페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시노다 마리코]]가 적혀 있었다고. 아키모토 야스시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멤버들에게 고생을 시켰다는 의혹이 있지만, 이건 아키모토 야스시가 과거 아주 일순간 히트쳤던 때를 생각해 그의 연줄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다. 애초에 아키모토 야스시는 성공한 프로젝트보다 실패한 프로젝트가 더 많고, 일종의 먹튀까지 한 적이 있어서 업계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 오냥코 클럽의 대성공으로 만들어진 연줄은 이미 2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는 빛이 바랬고, 실제로 2000년대 당시의 방송 등을 살펴보면 아키모토 야스시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프로젝트 자체가 어마어마한 예산이 드는 프로젝트다 보니, 초기 AKB48은 자금 확보에도 굉장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아키모토 야스시의 연줄을 통해서 어찌저찌 홍보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극장을 찾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이때는 단지 1000엔 정도 돈만 있으면 그냥 가서 표를 사고 관람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추첨으로 뽑힌 사람만이 관람할 수 있다. 어떤 오타는 무려 180여 번이나 응모했지만, 한번도 뽑힌 적이 없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