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AKB48/역사 (문단 편집) === 2006년: 팀K의 등장과 메이저 데뷔 === 1월 18일, 팬들의 투표를 받은 [[시노다 마리코]]에 대해 아키모토 야스시가 "4일 동안 12곡의 노래와 안무를 전부 외우면 무대 위에 서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시노다 마리코는 아키모토의 요구조건을 달성했고, 마침내 1월 22일 정식으로 가입했다. 2월 1일, 인디즈 싱글[* 인디라고 해서 인디 록밴드 같은 게 아니라, 정식 레이블을 거치지 않는 자체 유통 음반을 말하는 것이다.] <[[桜の花びらたち]]>을 발표하였다. 이 곡은 첫 세트리스트인 'PARTY가 시작된다구'에 수록된 곡 중 팬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것이었다. 2월 4일, 처음으로 극장 객석이 만원이 되었다. 즉, 250명의 관객이 마침내 채워진 것이었다. 2월 26일 후쿠오카를 시작으로, <[[桜の花びらたち]]>를 홍보하기 위한 전국캠페인투어를 시작했다. 3월 5일 히로시마, 3월 11일 나고야, 3월 12일 오사카, 3월 18일 가나자와, 3월 19일 타카마츠, 3월 25일 센다이, 3월 26일 삿포로까지 약 한 달에 걸친 투어였다. 한편 첫 싱글을 발표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인 2월 초, 2기생 오디션이 열렸다. 기존과는 다르게 일본통신회사 도코모와 함께 기획한 오디션으로, 핸드폰 화면과 화상연결해서 오디션을 진행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이 오디션을 통해 최종합격한 19명의 소녀들이, 2월 26일 2기생으로서 AKB48에 합류하였다. 초기 운영은 멤버를 1군과 2군으로 나눌 예정이었다. 미디어 활동에는 1군 멤버들만이 나서고, 2군은 팬 투표에 따라 1군 멤버와 자리를 바꾸는 형식으로 멤버를 구성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이미 팀A 결성 초기부터 스탭들은 멤버들에게 계속해서 "네 옆에 있는 아이는 네 동료가 아니다. 네 자리를 빼앗을 라이벌이다."라고 주입시켜왔다고 한다. 그러나 팀K의 등장으로 팀A 내에서도 더 이상 라이벌로서가 아니라 팀의 동료로서 뭉쳐야 한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초기 팀A와 팀K는 경쟁 관계였다. 2기생 모집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팀A에서는 이미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극장 데뷔한 지 아직 채 3개월도 안 지났을 때였으니까요. 새로운 멤버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에? 우리가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마에다 아츠코]]가 회고했다. 스탭들은 팀K 멤버들이 아직 레슨을 받고 있을 때부터 멤버들에게 "너희들은 팀A의 땜빵일 뿐이다."라는 식의 발언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팀K 멤버들 사이에서는 팀A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팀K는 그렇게 단결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극장 데뷔 바로 전날에는 [[아키모토 사야카]]와 [[오오호리 메구미]]가 멱살잡이까지 하면서 싸울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3월 하순, 팀K 극장 데뷔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무렵, 팀A 멤버와 팀K 멤버는 첫 대면식을 가졌다. 4월 1일, 팀K의 첫공연이 열렸지만, 첫공연의 세트리스트는 팀A의 첫공연 세트리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팬들 사이에서도 팀A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첫날 만원이었던 객석은 불과 3일만에 반토막이 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4월 8일 운영은 [[타카하시 미나미]]를 팀K 공연에 서프라이즈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 물론 타카하시 본인은 나가길 꺼렸지만, 운영의 막무가내에 어쩔 수 없이 딱 한 곡에만 출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한 곡에 등장했을 뿐임에도, 극장 안은 미나미 콜로 가득했다고 한다. 팀K 멤버들은 이날 이후 "타도 팀A, 타도 다카미나"를 기치로 똘똘 뭉치게 된다. 훗날, [[오오시마 유코]]와 타카하시 미나미가 대담기획을 하는 자리에서 이 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오시마 유코는 "정말로 싫어했다. 미워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팀K가 그 정도로 단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털어놓았다. 6월 7일, 두 번째 인디즈 싱글 <[[スカート、ひらり]]>을 발표하였다. 이 곡으로 유명한 음악 방송인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하였다. 당시 뮤직 스테이션 등 음악방송에서는 좀 독특한 뮤지션들을 발굴하는 기획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아키하바라에 웬 여자애 집단이 아이돌이랍시고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출연을 요청한 것이었다. 물론 출연했을 때도, "아키바잡"이란 식의 조롱을 받았다. 7월 8일, 팀K 2nd 세트리스트 青春ガールズ 첫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은 팀K 오리지널 공연으로, 팀K의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특히 그 중 転がる石になれ는 오늘날까지 팀K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잡았다. 7월 26일, 하나야시키 투어가 열렸다. 팀A, 팀K 멤버들이 팬들에게 직접 만든 주먹밥[* 이 주먹밥 속에는 멤버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각각 넣었다. 예를 들어 타카하시 미나미는 초콜렛을 넣었다.]을 전달하고, 버스를 타고 왕복 네 시간 거리의 놀이공원까지 가서 같이 놀고 오는 투어였다. 8월 22일, 공식 팬클럽인 '기둥의 모임'을 결성하였다. 기둥이란 전용 극장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부 좌석에서는 이 기둥 때문에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겨둔 것이었는데 이후 극장의 상징이 되었다. 10월 25일, AKB48은 [[소니 뮤직]]의 서브 레이블인 데프스타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첫 싱글은 <[[会いたかった]]>로, 지금은 AKB48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잡은 곡이다. 본래 [[会いたかった]]는 팀A 2nd 세트리스트의 대표곡으로, 당연히 이 싱글을 부를 멤버는 팀A로만 나올 거라고 팬들은 예상했다. 하지만 운영은 녹음하는 20명의 멤버 중 9명을 팀K로 채웠다. 자연히 [[우라노 카즈미]] 등 팀A 멤버 9명은 녹음에 참여조차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팀A 팬들과 팀K 팬들 사이의 경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11월 3일과 4일, 양일에 걸쳐 일본청년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콘서트의 이름은 "퍼스트 콘서트 '만나고 싶었어! ~기둥이 없어!'였다. 11월 3일에는 팀A와 팀K가 각각 세트리스트 공연을 펼쳤고, 11월 4일에는 팀A가 팀K의 세트리스트 곡을, 팀K가 팀A의 세트리스트 곡을 부르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팀A, 팀K 서로 간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하느라 교류가 오갔고, 이 때부터 멤버들 사이에 있던 경쟁의식이 조금 약화되었다. 한편 당시 운영에서는 1200석의 티켓을 모두 팔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티켓이 남아서 천으로 빈 자리를 가려놨고, 물론 멤버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1월 하순, 3기생 오디션이 열렸다. 이 날 총 20명의 3기생이 합격했고, 12월 9일 아키하바라 DUX에서 열린 1주년 기념라이브 'NTT DoCoMo presents AKB48 1st Anniversary Live! 전부 모인 A, K, B 공연'에서 피로연을 가졌다. 이날이 팀B 멤버들 한 명 한 명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어필한 때가 되었다. 그러나 피로연 후 힘든 레슨을 견디지 못한 3기생이 속속들이 탈락, 결국 남은 인원은 13명에 불과했다. 팀A의 세트리스트를 구성하는 멤버는 20명, 팀K의 세트리스트를 구성하는 멤버는 16명이었으므로, 이 세트리스트를 물려받게 될 팀B는 최소한 16~2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 12월 8일, 1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팀A의 [[오리이 아유미]]가 기둥에 처음 분홍테이프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매년 이 날이 되면 기둥에 분홍테이프를 붙이는 의식이 계속되었다. 12월 중순.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팀A 멤버들에게 스탭이 팀A 멤버 중 4명이 팀B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팀A의 모든 멤버들이 충격에 빠졌고, [[타카하시 미나미]]를 본 스탭이 "타카하시, 넌 어때?"라고 물었다고 한다. 타카하시 미나미는 "뭐라고 말씀드리기 힘든데요"라고 간신히 대답했지만, 자신이 팀B로 간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2월 18일, [[토가사키 토모노부]] 지배인이 팀A 멤버를 모아놓고 팀B로 이동할 멤버로 거론한 것은 [[우라노 카즈미]], [[히라지마 나츠미]], [[마스야마 카야노]], [[와타나베 시호]]였다. 우라노 카즈미는 훗날 "솔직히 '좌천'당하는 느낌이었어요"라고 털어놓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