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C-17 (문단 편집) === 험난했던 과정 === 시제기는 AMST 계획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능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프로젝트가 C-X로 이행하면서부터는 예산문제에 기대 이하의 성능으로 문제가 많았다. [[미 공군]]은 당초 210대를 구매하려 했으나, 냉전이 종식되고 군축의 시대가 도래하자 1990년 [[딕 체니]] 당시 국방장관이 구매대수를 120대로 축소해 버린다. 결국 첫 비행은 예정을 1년 넘긴 1991년 9월 15일에 이루어진다. 당시 C-X 프로젝트는 국방예산의 축소에 따라서 예산문제에 봉착하였다. 거기에 C-17은 늘어난 중량, 기대치에 못 미치는 연비와 적재력, 항속거리는 물론 병력 공수 시 기류가 [[낙하산]]에 미치는 영향, 소프트웨어, [[랜딩 기어]]까지 다양한 문제로 인해서 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이때문에 맥도넬 더글라스의 손실은 1993년까지 15억 달러에 근접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프로젝트의 지연으로 인해서 1994년에는 구매대수가 32대로 축소되기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사업타당성에서도 잡음이 많았다. 1994년 미 회계감사원(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대한민국 [[감사원]]에 대응하는 기관으로 의회 소속이다. 임기 15년의 회계감사원장이 지휘한다.] 보고서에서는 C-5보다 C-17에 투자되어야 한다는 공군과 국방부의 연구결과가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착륙 가능거리가 단지 [[활주로]]의 크기에만 맞춰져 있고 적재중량은 고려하지 않았기에 미국 영토 외의 가용비행장은 공군과 국방부 주장대로 6400개가 아니라 911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보고서조차도, C-17의 저규격 활주로 대응능력을 고려하지 않아 결함이 있었다. 이외에도 GAO의 비판은 계속되었다. 1995년에는 기주문된 120대에 대해서는 도입단가가 계약당시에는 3950만 달러인데, 210대 전체에 대해서는 그 단가가 4180만 달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가 하면, 1997년에는 만재상태에서 표면이 젖은 900m 활주로에 착륙할 수 없고 시뮬레이션 결과 1500m는 필요하다는 골자의 보고서를 냈다. 그 때문에 맥도넬 더글라스는 박물관에 보낸 YC-15를 다시 갖고 와서까지 실험을 다시 해서 기술적 요구사항을 맞추어 내었다. GAO가 지적한 기술적 문제는 지금에는 다 해결된 사항이다. 경영위기에 몰린 맥도넬 더글러스는 1997년 회사 자체가 보잉으로 넘어갔다. 결국 C-X프로젝트에서 초반에 탈락했던 보잉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C-17은 이후 보잉의 주력상품으로 꾸준히 생산되다가, 2015년 더 이상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단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