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D-WAR/논쟁 (문단 편집) === 한국 영화계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 === 흔히 "[[충무로(은어)|충무로]]"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계의 주류세력이다. 한국 영화계에 대한 적개심은 [[심형래]] 본인이 《[[영구와 땡칠이]]》가 상당한 흥행에도[* 서울 43만 관객으로 당시 한국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세웠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그 당시에 이보다 많은 관객이 들어온 영화가 75만의 《[[마지막 황제]]》와 60만의 《[[다이 하드]]》뿐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3편의 60만 명보다 더 많이 봤다.] 불구하고 당시 충무로 영화인들이 "어디서 코미디나 하던 새끼 따위가 설쳐?" 라면서 무시당했던 점이 반영되었다고 봐도 된다. 실제로 《영구와 땡칠이》는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을 한국영화 최다 관중 집계에서 의도적으로 빠졌었다. '아이들만 와서 본 게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까지 표를 사서 봤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심형래와 디빠의 한국 영화계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의 근원은 충무로가 스스로 제공한 점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가 너무 형편없게 만들고 어린이 대상으로 한정했으니 영화 관계자들이 얼마나 기가 찼을까? [[디빠]]들은 한국 영화계는 세계 시장을 노린 《디 워》와 같은 영화를 만들지 않으므로 진취성과 창조력이 부족한 집단이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영화계에서는 《디 워》와 같은 수출을 위한 영화는 제작하지 않고 [[조폭 코미디]]만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디 워가 개봉한 [[2007년]] 당시에도 조폭 코미디는 이미 한참 전에 사그러든 유행이었다.[* 조폭 코미디의 황금기는 [[2001년]]으로 이 때 나왔던 영화가 《[[두사부일체]]》와 《[[신라의 달밤(영화)|신라의 달밤]]》 그리고 《[[달마야 놀자]]》. 《디 워》가 나오기 무려 5년 전에나 흥행했던 장르다.] 그런 영화들은 성수기 때나 나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한국 영화계가 그런 것만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심형래 감독부터가 디워 훨씬전에 《조폭닷컴》이라는 조폭영화 찍은 경력이 있었다'''.[* 다만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찍고 인터넷같은 곳에서만 한정적으로 공개된 작품이라 이 작품의 존재는 많이 알려져있지 않고 [[화장실 유머]]같은 저질 성인유머들이 많아서 진정한 심형래의 흑역사라고 여기기도 한다.] 거기다 차기작은 다름아닌 '''미국판 조폭 코미디 《[[라스트 갓파더]]》'''이고 이 영화 역시 선술한 조폭닷컴의 요소를 일부 계승하고 있다.(덜떨어진 조폭 아들 설정 등) 애초에 대중 문화에서 수출만을 위한 상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 들어 [[한류]]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 시발점인 《[[겨울연가]]》가 처음부터 일본 수출은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인가? 《[[대장금]]》은? 오히려 처음부터 철저하게 일본 수출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태왕사신기]]》는 실적이 저조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한국 가요 사상 신기록을 세운 [[방탄소년단]] 역시 해외진출을 고려하지 않은 그룹이었다.[* 케이팝 그룹들이 해외 진출을 노리고 영입하는 외국인 멤버도 없는, 전원 한국인 그룹이다.] 이들도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인기를 인정받고 성공한 후에 자발적인 해외 K-POP팬을 바탕으로 해외에 진출한것이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국내 성공을 바탕으로 감성적인 면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해외 팬 혹은 타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이용해서[*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와 팝 음악이 수십년째 전세계를 휩쓰는 배경이 이것이다. 미국이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으로 다른 나라에선 불가능한 것들을 보여줘왔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미국 경제가 하락하자 아시아권에선 일본 대중 문화가 그 틈을 파고든 것이고 일본 경제가 빛을 잃은 후인 2000년대에는 [[한류]]가 등장한 것이다.] 수출을 하지, 처음부터 자동차마냥 기획해서 들이대지는 않는다. 1970년대 이후 일본 정재계에서 대중 문화도 자동차처럼 수출하자는 시도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J-POP 가수가 하자는 것. 하지만 그게 될 리가 있나...[* 이미 1963년에 '上を向いて歩こう(위를 보고 걷자)'라는 곡으로 동양인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를 한 [[사카모토 큐]]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