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DJP연합 (문단 편집) == 개요 ==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을 필두로 한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자유민주연합]]이 공동 여당의 목표를 가지고 결성한 연합. 이 연합이 성공하면서 [[1997년]]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연립 정부]]'''로 남아 있다. 대선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 김종필은 책임총리를 맡으며 임기 2년차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하여 임기 후반은 김종필이 내각제 하의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책임을 질 것이라고 공약했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김대중이 김종필에 어느 정도 실권을 주어 자율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 [[김대중]]의 이니셜인 'DJ'와 [[김종필]]의 이니셜인 'JP'를 합쳐서 생겨난 용어로 나중에는 세가 약하긴 했지만 [[박태준(1927)|박태준]]까지 이 연합에 합류하면서 [[호남]]의 김대중(DJ) + [[충청]]의 김종필(JP) + [[TK]]의 박태준(TJ)을 의미하는 'DJT연합'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구도상 DJP연합이 정설이다. 불과 7년 전에는 [[김종필]]이 [[공화계]]를, [[박태준]]이 [[노태우]]를 대신해 [[민정계]]를, [[김영삼]]이 [[민주계]]를 대표하여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참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DJT연합은 당시 민주계가 장악한 [[신한국당]]에서 쫓겨난 공화, 민정계 세력 일부가 평민당과 연합한 [[평화민주당|평민]]-[[공화계|공화]]-[[민정계]] 연합이자 [[부울경|PK]] 고립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DJ 측은 PK에도 아예 신경을 안 쓴 건 아니라 DJT 연합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통합민주당(1995년)|꼬마민주당]]의 'PK 4인방' 영입에도 나섰다. 이중 '''[[노무현]]''', [[김정길(1945)|김정길]]은 국민회의에 합류했고 [[이철]], [[제정구]]는 한나라당 창당에 참여했다. 심지어 [[상도동계]]의 거물인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측에 접촉한 적도 있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03000329105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0-30&officeId=00032&pageNo=5&printNo=16259&publishType=00010|'이젠 PK와 접속' DJP 여세몰이. 경향신문. 1997.10.30]].] 하지만 DJP 연합 이후에도 [[TK]]는 보수정당 지지를 크게 버리지 않았고 [[충청도]]는 그나마 [[캐스팅보트]] 지역이 되었지만 텃밭화까진 실패해[* 애초에 충북은 이전부터도 캐스팅보트 지역이어서 충청지역정당은 주로 충남에서만 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론 3당 합당의 영향이 상당 수준 지속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게 [[노무현]]의 [[부울경]] 공략과 [[세종특별자치시]]로 대표되는 충청도 민심 안기였다. 2002년에 있었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함께 성공한 단일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