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DJP연합 (문단 편집) ===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 [[김대중]]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지만 1년 만에 귀국해서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면서 정계 복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정계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물론 [[김대중]] 자신이 속했던 [[민주당(1991년)|민주당]]의 [[이기택]] 총재 등 [[14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인사들까지 대놓고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1991년]] [[평화민주당]]과 [[꼬마민주당]]의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당(1991년)|민주당]]은 [[1992년]] [[김대중]]의 정계 은퇴 선언 후 [[꼬마민주당]] 출신의 [[이기택]]이 총재로 선출되어 이끌어 왔으나 밖으로는 거대 여당에 눌리고 안으로는 당내 다수파인 [[동교동계]]와 마찰을 빚는 상황이었다. 특히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 공천과 [[김대중]]의 선거 지원 유세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간의 갈등이 공공연하게 불거졌다. 당시 승부처인 [[서울특별시장]] 후보를 둘러싸고 이기택 전 총재는 [[이회창]] 영입을 추진했지만 거절당했는데 동교동계가 영입한 [[조순]] 전 부총리가 후보로 나서서 김대중의 지원 유세를 등에 업고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선 이기택 전 총재가 지원한 [[장경우]] 전 의원이 동교동계가 지원한 [[이종찬(1936)|이종찬]]을 경선에서 물리치고 본선에 진출했지만 정작 본선에선 동교동계의 무시 속에서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에게 참패했다. 후보 공천과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이기택]] 전 총재와 동교동계 사이에 감정적인 설전이 오고 갔고 관계는 사실상 파탄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기택]]은 '김대중이 [[상왕]]처럼 굴면서 동교동계가 사사건건 총재의 지도력을 무시한다'고 불만을 표시했고 [[동교동계]]는 '총재가 무능하니 당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리고 이기택 전 총재와 일부 언론은 이런 동교동계의 강경한 자세를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위한 떡밥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자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조순]] [[서울특별시장]]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그야말로 구름 관중을 동원하였고 이것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기택 총재는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언론들도 김대중의 지원 유세를 사실상의 정계 복귀라고 인식하였다. 당시 친김대중계 인사들은 정계 복귀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민주당 잔류와 신당 창당으로 갈렸다. 잔류파들은 어차피 우리가 숫자상 다수이니 [[전당대회]] 총재 경선에서 승리하고 당권을 쥐는 게 순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당파들은 총재 경선 승리야 당연하지만 그 뒤에 이기택을 중심으로 비주류들이 결집해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면서 당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 뻔하니 순간이야 욕을 먹겠지만 장기적으론 신당을 차려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일사불란한 지도 체제를 구축하는 게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이미 [[1995년]] [[지방선거]] 공천 문제로 이기택에게 감정이 상했던 김대중은 신당파의 손을 들어줬다.[* 동교동계 내에서는 지지자들이 모은 돈으로 마련한 당사가 아깝지 않냐는 여론도 있었으나 끝내 당사까지 버려 가면서 분당했다. 그 정도로 양자 간의 사이가 나빴다. 문제의 당사는 이후 통합민주당 - 신한국당 합당 과정에서 한나라당 소유가 되어 버렸고(...)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추징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매각되었다.] 결국 민주당이 약진한 지방선거 직후인 [[1995년]] [[7월]]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전라도|호남]] 유권자들을 믿고 민주당을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했는데 그 결과 90명이 넘던 [[민주당(1991년)|민주당]] 의원 중 65명[* 이 중 13명은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민주당을 탈당하면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당적은 민주당이지만 사실상 새정치국민회의를 위하여 활동했다. 훗날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박주현(1963)|박주현]], [[장정숙]] 전 의원을 가르키는 말인데 이 둘은 공식적으로는 바른미래당 소속 비례대표 의원이었지만 사실상 민주평화당 소속 의원들이었다.] 정도가 [[새정치국민회의]]로 대거 이동했고 민주당에는 30여 명 정도가 잔류했다. 허나 이는 사실상 야권 지지표를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야권 표심이 갈라지면서 여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에는 미달했지만 139석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지켜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사실상 패배했다.[* 당시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후보가 3000표 이내의 박빙승부를 보인 지역구가 전국적으로 58개에 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야권표 분산이 패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통합민주당(1995년)|민주당]]은 아예 15석에 그쳐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해 몰락했는데 이들은 훗날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이 됐다.] 그리고 이 선거의 패배로 [[김대중]]은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는데 당시 김대중의 정치 참모였던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이 [[김종필]]과 손을 잡아야만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일명 'DJP 연합' 초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김대중에게 조언하였고 김대중이 이 조언을 수락하면서 김대중은 [[김종필]]과 1년이 넘는 협상 과정에 돌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