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DJP연합 (문단 편집) ===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창당 === [[신민주공화당]]을 이끌었던 [[김종필]]은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노태우 정부]] - [[문민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고 [[김종필]]은 [[김영삼]] 이후 차기 대권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활동해 왔던 그에 대해 구원(舊怨)이 있었던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민주계]]는 김종필을 좋게 보지 않았고 당내 계파 투쟁에서 밀린 김종필은 [[민주자유당]]에서 사실상 철저한 비주류로 몰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영삼]]과 민주계가 [[박정희 정권]] 시절 당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초산 테러]]나 야당 의원 [[고문]] 등을 생각해 보면 미워할 법도 했다. 다만 [[김종필]]도 억울한 부분은 있는데 종신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에게 [[김종필]]은 언제 자기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눈엣가시였고 덕분에 조카 [[사위]]임에도 세 차례나 가택 수사를 당하는 등 엄청난 견제를 받고 사실상 정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종필은 [[박근혜]]와도 소원했다. 사실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시절 양김이 각종 탄압을 받으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지속했을 때 김영삼이 김종필에 사람을 보내서 같이 [[전두환 정권]]과 싸우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김종필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국면이 도래했을 때 김종필이 전격 귀국해서 정계 복귀와 [[신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하자 "남들이 피흘리며 싸울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무임승차]]하느냐"는 비판도 상당했다.] 그러자 [[김종필]]은 자신을 따르던 [[공화계]]와 마찬가지로 [[김영삼]]에게 피를 본 [[민정계]] 일부 세력을 이끌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1995년]] 1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1995년]] [[1회 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대전]]-[[충청남도]]-[[충청북도]]-[[강원도]] 4곳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한 데 이어 다음해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김종필이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내세워 지역 민심에 불을 붙여 [[충청도]] 전체 [[선거구]] 28개 중 24개를 석권했고 그 외에도 [[문민정부]] 심판론을 내세워 [[경기도]]에서 5석, [[경상북도]]에서 2석, [[강원도]]에서 2석을 차지했으며 특히 [[TK]] 홀대론으로 반YS, 반신한국 바람이 불던 [[대구광역시]]에서는 13석 중 8석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50석을 확보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이는 [[한국]]에서 이른바 '제3당'이라고 불리는 정당들이 역대 선거에서 거둔 성적 중 가장 좋은 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종필]]은 이와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자신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대권을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3당 합당]] 시절처럼 누군가와 함께 공동 정권을 창출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야권에서 [[김영삼]]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김대중]]은 당연히 첫 번째 협상 대상이었다. 참고로 당시 [[자민련]] 안에는 [[김종필]]의 직계 세력인 [[충청]] 그룹, [[TK]]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 일부[*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던 [[김복동]], [[박준병]]도 있었다.], 그 외 非김종필 세력, 이렇게 세 개의 계파가 있었는데 그 중 각 그룹의 중심 인물은 [[충청]] 그룹 [[김용환(1932)|김용환]] 전 부총재, [[민정계]] [[박철언]] 전 의원, 非김종필 세력 [[한영수(정치인)|한영수]] 전 부총재였다. 당초에 충청 그룹과 非김종필 세력은 DJP연합에 부정적이었으나 의외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화국]] 내내 [[김대중]]과 상극이었던 [[민정계]]는 이 연대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는 당시 [[박철언]]의 성향 덕분이기도 한데 [[3당 합당]] 문서에도 등장하지만 원래 [[노태우]]의 심복 박철언이 주도한 [[3당 합당]]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도 포함하는 '''4당 합당'''이 기본 구상이었지만 합당 제안을 김대중 총재가 거절하면서 3당 합당만 이뤄지게 된 것이니 JP와 마찬가지로 YS에 쫓겨나 권력과 멀어진 박철언 입장에선 재기를 노려 볼 만한 묘수였다. 그리고 충청 그룹이 김종필의 결단에 따라 찬성 쪽으로 기울면서 DJP연합은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