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DJP연합 (문단 편집) == 과정과 진통 ==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조는 [[1996년]] [[15대 총선]] 직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를 위해 [[무소속]]과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당선인들을 영입하자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국민의 뜻을 따르라'며 원 구성 협상에 불참했다. 이 여파는 상당히 커서 그 해 [[5월 26일]]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 자민련을 비롯한 야3당이 [[신한국당]] 규탄대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DJP간의 연대가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96년 재보궐선거]]에서 양당은 연합공천을 이루면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의 [[김용채]] [[서울]] [[노원구청장]], 뒤이어 [[유관진]] [[경기도]] [[오산시장]]이 당선되었다. DJP가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대세가 되었고 연말 [[자민련]] 소속이던 [[최각규]] 전 [[강원도지사]]와 [[류종수]], [[황학수]] 전 의원이 [[신한국당]]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두 야당의 결속이 더욱 강화되었다. 양당은 계속해서 [[1997년]]에 치러진 [[1997년 재보궐선거|국회의원 재보선]]에서 후보 [[단일화]]를 통한 연대에 돌입했고 그 결과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에서 치러진 3곳의 [[재보선]][* [[서구(인천 선거구)|인천 서구]](국민회의 [[조한천]]), [[수원시]] [[장안구]](자민련 [[이태섭(1939)|이태섭]]), [[만안구(선거구)|안양시 만안구]](자민련 [[김일주]]).]에서 모두 압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정치 성향도 영 맞지 않아 보이던 김대중과 김종필이 손을 잡는 일은 필연적으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군부 정권 시절엔 당연히 [[견원지간]]이었고 노태우 정부 시기에 평화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일시적으로 연합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때는 정권창출을 위한 목적보다는 그냥 야당간의 협력 정도의 수준이었다. 실제로 국민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시 모 [[여론조사]]에선 무려 70%가 넘는 국민들이 'DJP연합을 해선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김대중]]도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이 날아갈 것을 꽤나 우려해서 [[독일]]의 '신호등 연정'[* [[독일]]의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중도좌파]]), [[동맹 90/녹색당|녹색당]]([[환경주의]]), [[독일 자유민주당|자유민주당]]([[자유주의]] 우파)의 [[연정]]을 말하는 것으로, 각 정당의 테마색이 사회민주당은 [[빨간색]], 녹색당은 [[녹색]], 자유민주당은 [[노랑색]]이라서 [[신호등]] 연정이라고 부른다. [[90년대]] 이후 [[독일 녹색당]]이 급성장하면서 좌파 진영의 안정적 집권을 위해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이지만 자유민주당은 신호등 연정보다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민주연합]](보수 우파)과의 연정을 선호하기 때문에 보통 적녹 연정으로 끝났으나 [[2021년]]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총선]]에서 실현되었다.] 등을 거론하면서 DJP연합을 합리화하려고 노력했다. 또 [[김종필]]은 연대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갈지자(之字) 행보를 보이면서 [[김대중]] 측을 초조하게 했는데 이는 대권이 걸린 김대중 측이 연합에 더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급할 게 없는 김종필이 몽니를 부리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년 반이 넘도록 DJP연합이 큰 진척이 없던 상황에서 [[김대중]]은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태준(1927)|박태준]][* [[1997년]] 7월 [[포항시 북구(선거구)|포항시 북구]] [[선거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이기택]]을 꺾었다.] 영입에 공을 들였다. 김대중은 박태준이 합류한다면 [[김종필]]의 마음도 붙들어 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지지도 일부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97년]] 9월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도쿄 대첩(축구)|월드컵 예선전]]을 관전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만난 박태준과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김대중에 대해 여전히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박태준의 태도가 이 만남 덕분에 누그러졌고 결국 연합에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8011200289104001&editNo=7&printCount=1&publishDate=1998-01-12&officeId=00028&pageNo=4&printNo=3089&publishType=00010|한겨레신문 김대중 집권비사 월드컵정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