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FIFA (문단 편집) == 역사 == [[20세기]] 초. 몇몇 축구인은 국제적인 축구 연맹이 필요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인 FA는 특유의 고집 때문에 그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일단 [[프랑스]]에서 협회를 발족시키기로 한다. [[1904년]] [[5월 21일]] [[파리(프랑스)|파리]]에서 피파(FIFA)가 설립된다.[* 피파 공식 명칭이 [[프랑스어]]인 이유가 이것이다.] 초대 회장은 프랑스의 로베르 게랭. 첫 주관 대회는 [[1906년]] 국제 경기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회장이 잉글랜드 출신의 대니얼 벌리 울폴로 바뀌었고 [[1908 런던 올림픽]]에서 대회를 개최한다. 8개팀이 참여한 당시 대회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다. [[1909년]] [[남아공]], [[1912년]] [[아르헨티나]]와 [[칠레]], [[1913년]] [[캐나다]]와 [[미국]] 등 회원국이 [[유럽]]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제 경기 개최는커녕 회원국들이 탈퇴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영국 4개국이 이때 모두 탈퇴한다.] 결국 회원국은 20개국으로 감소했고 위기에 봉착한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타개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3번째 회장인 프랑스 출신의 [[쥘 리메]]가 바로 [[주인공]]. 리메는 1930년 [[우루과이]]에서 최초로 [[FIFA 월드컵]]을 개최했고 가입국들을 늘렸으며[* 중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음에도 탈퇴국이 없었다는 건 그만큼 피파의 힘이 강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제적인 조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월드컵 우승 컵도 "쥘 리메 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브라질]]이 3회째 우승을 하면서 영구소유(그러나 도둑맞아서 영원히 사라지고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하게 되어 이후 월드컵 우승 컵은 새로 만들어진다.] 이후 6대 회장인 [[잉글랜드]]의 스탠리 라우스 경은 피파의 사업 확장을 통해 재정 부문에 크게 기여했으며, 7대 회장인 [[브라질]]의 [[주앙 아벨란제]] 박사는 피파를 더 능동적인 조직으로 탈바꿈을 시키면서 상업적으로 엄청나게 키워냈다.[* 아벨란제가 정년 퇴임할 무렵, 하던 말이 이럴 정도다. "내가 회장이 되었을 당시, 피파 금고에는 2,000 달러조차 없었다. 하지만 퇴임하는 지금은 20억 달러는 넘게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FIFA는 위기를 다시금 겪는다. 전쟁 발발로 인해 [[1942 FIFA 월드컵]]과 [[1946 FIFA 월드컵]]이 취소된 것은 물론이요, 전쟁기 FIFA는 재정 문제로 인해 조직의 유지도 어려워 하였으며 전란에 휩슬리는 모습도 보인다.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가 당시 [[FIFA 월드컵 트로피]]였던 쥘 리메컵이 이탈리아에 진주한 나치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이탈리아 축구 협회 회장의 침대 밑의 신발 상자에 숨겨져 보관된 일. 여하튼 아벨란제 체제 이후 엄청난 자본과 힘을 가지게 된 피파이지만, 그 반대로 너무 상업적이라는 비난과 그 자본들을 도대체 무엇에 쓰이는가 하는 자세한 것을 비공개로 하면서 엄청나게 비난도 받게 된다. 더욱이 [[제프 블라터]] 회장 체제에선 그런 게 더더욱 노골적인지라 이 때문에 블라터의 체제를 혐오하는 축구 관계자들이 많은 편이고, 반블라터 파에 속하는 [[정몽준]] 전 부회장은 이들에게 호의적인 인상이었다. 피파의 내부 의혹 및 비리를 폭로하는 어떤 책에서는 정 부회장을 현대 가문의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귀공자라고 묘사했다. [[2011년]] 정몽준이 FIFA 회장 출마의[* 하지만 정몽준이 실제로 FIFA 회장에 출마했다 해도, 블라터를 이기기엔 무리였다는 분석이 많다. 이전 [[UEFA]](유럽 축구 연맹 회장)이었던 [[렌나르트 요한손]]이 정몽준과 손잡고 FIFA 회장에 출마했으나 80표를 얻는 데 그쳐 111표를 모은 블라터에 무난하게 낙선했고, 요한손은 다음 UEFA 회장 선거에서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미셸 플라티니]] 현 유럽 축구 연맹 회장에게 아쉽게 낙선하여 연맹 회장에서 물러났을 정도이다. 당시 국내외신도 이렇게 표차가 날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는데 FIFA 월드컵와 견줘 봐도 경제적으로 꿀리지 않는 [[UEFA 유로]]를 개최하고 그 힘이 엄청난 [[UEFA]]이라 이기지 못해도 꽤 대등하게 나올 것이란 분석이 컸기 때문이다. 그랬던 요한손도 이렇게 패했는데 하물며 정몽준이 아무리 요한손이나 반블라터 파 지지를 받는다고 해도 이들은 피파에서 실권 없는 명예직으로 전락해서 제대로 된 힘을 가지긴 어려웠다.] 사전 단계로 FIFA 부회장직 연임을 시도하면서 당당히 블라터에게 맞섰으나 결국에는 실패. 대신 '''명예 부회장'''이라는 아무런 실권 없는 직책을 얻으며 사실상 은퇴당했다. 그나마 [[김운용]]처럼 비리에 얽매이며 불명예적인 은퇴보다 낫긴 하지만, 피파에서 입지는 뭉개졌다. 그리고 모하메드 빈 함맘 전 [[AFC]] 회장이 피파 회장 출마에 도전하여 경쟁하게 되었으나, 갑자기 회장 출마를 포기하고 결국 영구 제명을(겉으론 금품 수수 같은 이유지만) 당했다. 그렇게 블라터가 무난하게 재선되던 와중에 2015년 회장선거에서는 제롬 상퍄뉴([[프랑스]]) 전 FIFA 국제국장과 알리 빈 알 후세인 부회장([[요르단]] 왕제로 현 요르단 국왕 아우)이 경쟁하게 되었다. 2016년 2월 27일, [[잔니 인판티노]] UEFA 사무총장이 9대 FIFA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참고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조추첨 진행자와 동일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