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GO(영화) (문단 편집) == 원작소설과 영화의 차이 및 작품의 주제 해석 == 참고로, 영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원작 소설을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소설과 영화의 표현 기술 차이 때문에 소설은 지문이나 내면 묘사 등을 통해 상세히 설명되지만 영화는 과감히 생략해버린 부분이 적지 않다. 사실 소설에서 설명하듯 영화에서 설명하려고 하면 상영 시간의 태반이 주인공의 독백으로 채워질지도 모르니 감독의 판단이 옳은 부분이긴 하다. 반대로 영화의 경우 영상과 대사를 통해 직관적으로 재미를 던져주는 부분이 많은 것이 장점. 다만, 영화에서 생략된 부분 때문에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위의 줄거리 설명 같은 경우도 소설판과 함께 보면 좀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많으니 참조할 것. * 스기하라의 아버지 히데요시가 조선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만든 심경의 변화가 영화에서는 거의 생략되었다. 원작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하와이에 가고 싶어서' 국적을 바꾼 게 아니다. 평생동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조선적을 가지고,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면서 살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북한이 완전히 몰락함에 따라 그런 신념을 자신을 억누르는 짐이자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처럼 느끼게 된 것. 그런데 아들(스기하라)이 성인으로 사회에 진출할 시기가 가까워지자, 그런 짐과 족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들에게 '자유로운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자신부터 조선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부인(주인공의 어머니)이 하와이에 가고 싶다고 조르던 것은 그런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계기 정도이지, 진짜 하와이에 가고 싶어서 국적을 바꾼게 아니다. * 위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하와이에 다녀온 뒤 여행 중 찍은 사진을 현관 바로 앞에 떡 걸어놓는 것 역시 아버지 나름대로 정치적 고려 끝에 나온 행동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조총련]]에서 탈퇴하고, 상당한 기부금을 내면서 [[민단]]에서 자기 자리를 얻기도 했지만 상당한 자산가인 히데요시가 빠져나가는 것을 조총련이 달갑게 볼 리 없고, 따라서 예전부터 히데요시와 친하던 사람들을 자꾸 보내서 다시 돌아오라고 설득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한 것. 그래서 조총련 내에서 퇴폐적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을 현관 바로 앞에 떡 걸어놓음으로써 '''옛 친구나 동료가 집을 방문하더라도 다시 조총련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자신의 각오'''를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알고 그냥 뒤돌아서 나가라고 걸어놓은 일종의 [[축객령]]이다. 이런 아버지의 행태에 대해 스기하라는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면 아버지가 평생 사귄 친구들을 저렇게 잔인하게 내쫓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미래가 없는 조총련이 자식(주인공)을 얽어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평생 동안 쌓아온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관계 단절을 서둘렀다는 상징이다. * 스기하라가 일본인 학교로 진학한 것 역시, 아버지에 대한 반발감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버지는 스기하라가 일본 학교에 진학하자 가족의 국적을 바꾸는 식으로 후원하는 인물에 가깝다. 또한 결말에서 히데요시가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역시 갑작스럽게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원작 소설 내용을 보면 '''억압적인 재일 조선인 사회'''와 '''차별적인 일본 사회''' 모두에 넌더리가 난 스기하라가 '노르웨이로 이민가겠다'고 발광하기 시작하자[* 일본에서 가능한 한 먼 곳에 가고 싶어서라고 한다. 한데, 히데요시가 '일본의 정 반대편은 아르헨티나인데 왜 하필 노르웨이냐'고 되묻자 '더운 건 싫어서'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그 대답을 듣고 스기하라가 철저히 이성적인 것을 알고 안심한다.(...)] 스기하라에게 비꼬듯이 스페인어 문장을 한 마디 들려준다. 요컨데, 히데요시 자신도 젊은 시절에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방황했고, 그 때문에 한국도 일본도 아닌 다른 나라로 도망치고 싶어 스페인어까지 공부했었다는 것[*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노르웨이로 가고 싶다는 스기하라의 발광은 '일본에서 가능한 한 먼 곳으로 가고 싶은데 더운 곳은 싫으니까 북유럽'이라거나 '예쁜 금발 아가씨'와 같이 별로 진지하지 못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고 정말 실행으로 옮기겠다고 치면 노르웨이와 같은 북유럽 국가의 이민 진입 난이도가 결코 낮지 않음도 생각해야 한다. 반면 히데요시는 (구체적인 정황까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굳이 그 구절 하나만 일부러 달달 외워둔 것이 아니라면) 수십년 뒤에도 간단한 문장정도는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스페인어를 공부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게다가 [[스페인어]]는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될 뿐 아니라 주 사용권 국가중에는 [[남미]]와 같이 상대적으로 이민 진입이 용이한 권역이 있다. (물론 이민을 위해 배워두면 가장 유리한 언어는 예나 지금이나 영어겠지만, 히데요시는 성향상 철저한 반미주의자일 것이 뻔하다는 점을 감안하자.) 즉 스기하라의 발광은 말 그대로 홧김에 소리 질러보는 발광일 가능성이 높은데 비해 젊은 시절의 히데요시는 훨씬 더 절박하고 진지하게 탈출을 고민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결국 작중 스기하라의 갈등과 고민은 젊은 시절의 히데요시가 겪은 고민과 갈등이기도 하고, 더욱 엄혹한 시대를 산 히데요시에게는 그 고민과 갈등이 더욱 절박했을 수도 있다는 것.][* 이때 히데요시가 스기하라에게 들려주는 문장이 바로 "노 소이 코레아노, 니 소이 하포네스, 조 소이 데사라이가도"("no soy coreano, ni soy japanes, yo soy desarraigado")로써, 히데요시 세대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작품의 주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장이다. 한국어판에서는 "나는 조선(한국)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떠다니는 일개 부초다"라고 ~~쓸데없이~~ 멋을 부려 의역해놓았지만 스페인어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번역하면 대략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나는 뿌리가 뽑혔다." 내지는 "나는 (고향이나 가족, 나라와) 유대가(인연이) 끊어졌다." 라는 지극히 직설적이고 처절한 의미인 것. 특히 스페인어를 단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전 한권만 가지면 쉽게 해석할수 있을 정도의 단순함이 강렬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일단 '나는 떠다니는 부초다'와 같이 비유적으로 돌려말하는 것이 아니라 딱 잘라 '유대가 끊겼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자신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며 또한 앞 주석에서 제시한 가능성처럼 히데요시가 정말 젊은시절 이민까지 생각하면서 스페인어를 진지하게 공부한 적이 있다면, 수십년간 쓰지 않아 배운 것을 많이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저 정도는 쉽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의 아주 간단한 문장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사실 부성애와,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외치지만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는 부자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 영화 첫 부분에 나오는 히데요시와 한국 대사관 직원의 실갱이 역시 '조선적으로 하와이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실갱이가 아니다. 어차피 [[조선적]]은 한국 국적자가 아니므로 조선적인 상태라면 해외 방문을 위해 한국 대사관에 뭔가 문의한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히데요시가 한국 대사관을 방문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조선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것이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실랑이는 평생동안 반한(反韓), 반미(反美), 친북(親北)주의자에 열렬한 [[조총련]] 지지자로 살아왔던 아저씨가 자신의 평생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큰 각오를 하고 한국 대사관에 찾아갔는데, 한국 대사관에서는 그를 전혀 위험시하거나 의심하기는 커녕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우리는 당신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자 거꾸로 이에 소외감을 느껴 투정을 부리는 것에 가깝다. > 히데요시: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 북한 이념서적들과 뱃지들을 대사관 직원앞에 보여주며) 이건 이제 필요없소. "여권이, 여권이 꼭 필요해."[* 이하, 따옴표 쳐 놓은 부분은 히데요시 역을 맡은 야마자키 배우가 어눌한 한국어로 말하는 부분이다.] > 대사관 직원[* [[명계남]]이 특별출연.]: 요즘은 북한 국적으로도 하와이 갈 수 있어요. 알았어요? > 히데요시: 나는 확실한 [[마르크스주의]]자라구.[* 북한은 [[주체사상]]외에 모든 공산주의 사상은 모조리 박해한다.] 스파이, "간첩인지, 간첩인지 모르잖아? 응?" > 대사관 직원: 쓸데없는 소리 자꾸하고 있네. 아, 문제없다니까. "캇테니 이케바 이이!(당신 맘대로 가면 돼!)"[* 일본어 대사. 일본인들은 거의 알아듣기 힘든 수준. 끝의 이이가 거의 이-로 말하여진다.] > 히데요시: 안돼, 도무지 말이 안 먹혀. > 히데요시 부인: 전 하와이만 가면 돼요. > 히데요시: (결심한 듯 대사관 직원에게) 좋아, "바꿔." 하와이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바꿔, 바꿔." 부탁할께요. > 스기하라의 독백: 재일 조선인이었던 아버지는 고작 하와이 여행을 위해 새로운 국적을 받아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 이 부분을 '될 수 있으면 조선적을 가진 채 하와이에 가고 싶다'는 히데요시와 '하와이에 가고 싶으면 한국 국적으로 바꿔라'는 대사관 직원의 언쟁이라고까지 잘못 해석하는 것은, 아마도 해당 장면이 거의 부조리극에 가까운 기묘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표면적인 대사만을 따라가면 <평생을 함께 한 아내의 소망(하와이 여행)을 들어주기 위해 역시 평생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소중히 지켜왔던 조선적을 포기할 각오로 한국 대사관에 찾아온 아저씨>에게 <한국 대사관 직원이 '요즘은 북한 국적을 가지고도 하와이에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조선적으로도 하와이 여행을 가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설명해 준 상황이다. 그러면 이 아저씨는 당연히 <아내의 소망을 들어주면서도 평생 소중히 해왔던 조선적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해당 장면에서는 엉뚱하게도 <'나는 확실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스파이, 간첩일지도 모르는데 너희(사실은 미국이지만)가 내 입국을 허락해서는 안되는거야!'> 라고 되려 트집을 잡고 있다. 그렇다면 히데요시(야마자키 츠토무)는 대체 왜 이런 해괴한 반응을 보이는가? 일단 이는 1차적으로는 위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상실감과 소외감'''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 국적을 얻는데 도움이 될 리 없는 (오히려 민감한 시기였다면 악영향을 끼칠) 북한 이념서적과 김일성 뱃지따위를 굳이 가져가서 보여주며 '이건 이제 필요없다'고 과시하는 모습에서도 엿보이는 것처럼, 북한이 망쪼가 들면서 자기 자신도 조선적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이 인물에게 평생에 걸쳐 형성하고 지켜온 자기 정체성의 일부였다는 것. 그러니까 잘 해야 무의미하고 잘못하면 오히려 자기에게 손해일 것이 뻔한데도 굳이 '나는 이런 것을 지금까지 지켜왔지만, 이제는 버리는 것이다'라고 과시하면서 상대가 그런 자신을 경계하고 위험시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을 전혀 위험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약한 존재였다는 뜻이니 '잘 생각해 봐라, 내가 정말 그렇게 약하냐? 정말 너희에게 조금도 위험이 되지 않는거냐?" 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해당 장면을 끝맺음하는 스기하라의 대사, 즉 "아버지는 고작 하와이 여행을 위해 새로운 국적을 받아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가 [[반어법]]임을 보여주는 장치라 해석할 수 있다. 작품 전반에서 꾸준히 드러나는 내용이지만, 히데요시가 '''조선적을 버리고 재일 한국인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식인 스기하라''' 때문이다. 히데요시 자신은 나름 성공한 권투선수로 빠칭코 경품 교환 매장을 6개나 가진 부자임에도 재일 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신용카드]] 발급조차 거절당할 정도로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다. 이는 역으로 보면 히데요시에게 조선적은 그것만 버리면 훨씬 편하고 쉽게 살 수 있음을 알면서도 평생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지킬 정도로 소중한 정체성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이 정체성을 버릴 수 밖에 없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세상이 변하고 북한이 망쪼가 들면서 이 '''조선적이 자식의 미래를 짓누르는 족쇄'''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임이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다. 히데요시 자신은 이미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많은 나이가 되었으니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 있겠지만,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스기하라의 인생까지 그 틀 안에 가둘수는 없었기에 히데요시 자신이 많은 것(예를 들어 평생 사귄 친구들)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의 발목에 걸린 쇠사슬 하나를 끊어주기로 결심하고 자신부터 조선적을 버린 것. 그러니까 '하와이 여행'은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된 계기, 또는 핑계일 뿐,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만약 하와이 여행 자체가 이유였다면 (사실 여행 한번 때문에 평생동안 지킨 정체성을 포기한다는 것도 허탈한 일이지만) 조선적을 가진 상태로도 하와이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굳이 한국 국적을 얻을 필요도 없어진 것인데, 그래도 굳이 한국 국적을 얻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좀 덜 꼼꼼한 관객이라도 하와이 여행이 진짜 이유가 아님을 눈치채기 쉬우리라는 것. 다만 대사관 직원이 이런 히데요시의 반응에 눈치빠르게 "그렇군! 당신은 간첩일지도 모르니 하와이에 갈 수 없어! 가고 싶으면 한국 국적을 받으라고!!" 라고 맞장구쳐주는 대신 (사실 공무원인 대사관 직원의 입장상 설령 상대의 속마음을 눈치채더라도 대놓고 맞장구쳐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고 짜증을 내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신 맘대로 가면 돼!" 라고 짜증을 내 버림으로써 히데요시가 기껏 마련한 핑계가 무너져버렸고,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어도 하와이는 미국 땅이니, 혹시 거기 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그러니 하와이에 가려면 한국 국적을 가지고 가야 안심할 수 있다) 는 새로운 핑계를 급히 만들어내는 새로운 촌극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이 또한 우스꽝스럽다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동시에 조선적이라는 정체성이 히데요시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던 것인지 또 한번 보여주는 장치라 해석할수도 있는 문제이다. 히데요시에게 조선적을 버린다는 행위는 이미 결심하고 한국 대사관까지 온 상황임에도 '조선적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라는 핑곗거리 없이는 실행에 옮기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행위라는 것. * 히데요시와의 대화에서 대사관 직원(명계남)이 '요즘은 북한 국적으로도 하와이 갈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부분은 2010년대 후반~2020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원작 소설과 영화 모두)이 어떠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창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로 기능한다. 1990년대 초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었다는 것은 곧 세계를 전쟁과 멸망의 공포에 몰아넣은 범 세계적 규모의 갈등이 종식되었다는 의미고, 이에 따라 1990년대 초~2000년 전후는 평화와 화합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이 팽배한 시대였다. 북한 국적으로도 엄연한 미국 영토인 하와이에 갈 수 있다는 것 역시, 냉전 구도가 무너지면서 미국인들도 과거 냉전시대 이래의 적국이던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크게 늦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하지만 2002년 9.11 테러로 시작하여 새로운 범 세계적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 극단주의적 정치 세력들이 등장하여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북한의 경우 핵 개발 관련 문제로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 고립되면서 이런 '좋은 시대'가 결국 끝나고 만 것이다. 2020년 현재라면 북한 국적으로 하와이 절대 못 간다. '국적이란 입은 옷이나 사는 집과 같은 것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다른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작품의 주제 역시, 긍정적 미래상이 팽배한 집필 당시 시대와는 달리 세계 곳곳에서 폐쇄적 고립주의 경향이 강해지면서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집에서 산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작품 출간 후 이십여년이 지나는 동안의 세계적 변화를 알 수 있는 계기인 동시에 씁쓸하기도 한 부분. *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히데요시가 운영하는 것은 빠칭코가 아니라 빠칭코 경품 교환 매장이다. 사실 빠칭코 자체보다 더 안전하고 수익율이 높은 소위 꿀빠는 가게인데, 부모에게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고아가 복싱 선수로 성공해서 경품 매장을 6개나 차렸지만, 일본의 사회적 차별 때문에 결국 그 가게들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모습이 히데요시의 인생을 설명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 * 이 소설이 세대를 이어오는 [[자이니치]]들의 정체성과 차별을 다룬 소설임을 볼 때 작은 비중이지만 힘있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이야기 말미에 등장하는 [[오스기 렌]]이 연기한 택시기사는 히데요시와 스기하라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자이니치임을 알고서도 히데요시의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다거나 아버지에게 버릇없이 말하는 스기하라를 책망하는 모습을 통해 같은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국적을 뛰어넘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동질감있는 인물상을 보여준다. 이 택시기사와의 공감 역시 상당히 복잡한 부분이다. 히데요시와 비슷한 연배의 택시기사는 히데요시가 이야기하는 전후 빈곤기의 힘든 추억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버릇없이 구는 스기하라에게 화를 내며 히데요시에게 '제가 대신 저 버릇없는 아들놈 혼쭐 좀 내 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 인물이다. 즉 히데요시와 강력한 동질감과 이해를 나눌 수 있는 인물인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인물이 스기하라와 히데요시간의 갈등을 온전히 이해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나(우리 세대)까지 그 구질구질한 시대의 망집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스기하라의 항변 자체가 히데요시의 입장에서는 괴롭고 짜증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 전후시대부터 쌓여온 [[조총련]]의 망집이 자신과 자기 또래 친구들의 삶을 억누르는 것을 실제로 겪어온 스기하라로써는 당연히 화를 낼 만한 상황이고, 히데요시 자신도 이를 잘 아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인 택시기사는 '''이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는 없고,''' 따라서 자신이 아는 부분-부모 세대를 무시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분개-에만 공감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실제로 영화에서도 '요새 젊은애들은 위험해서 믿을 수 없다'면서 스기하라가 흉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검사를 해본다거나, 히데요시가 스기라하를 보기좋게 때려눕히자 마치 자기 자신이 강적과 싸워 물리친 것처럼 기뻐하며 방방 뛰는 등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이 꼭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타인간에도 공감과 동질감은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간접적으로만 등장하는 관청 직원 역시 그러한데 외국인 등록제 때문에 '''지문 날인'''[* 한국인에게는 주민등록증 때문에 당연하고 무감각할 수 있지만, 아무 범죄에도 연관되지 않은 사람을 예비범죄자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인 반응이다.]을 하러간 선배가 너무 화가나 직원을 두드려 패고 싶었지만 그 사람 역시 평범한 소시민임을 깨닫고 그 난폭한 선배를 돌아서게 만든다.[* 영화에서는 지문을 날인하는 동안 그 모습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가려주는 배려를 받은 선배가 난생 처음으로 남에게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고백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처음 지문 등록을 하러 갈 때는 범죄자 취급이 기분 나빠서 일단 지문 등록 하고 나서 직원들을 좀 두들겨 패줄 생각을 하고 갔는데, 이미 다른 사람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에 멍이 들어 있으면서도 몇번씩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직원의 초라하고 지친 모습이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문 찍는 모습을 가려주는 배려 등을 보고 주먹질을 할 마음은 싹 사라지고, 나오면서 평생 처음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서술되었다. 다만 원작 내용을 보면 이것이 꼭 긍정적인 이해와 공감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달려서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겠다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던 선배가 지문 날인 절차 마친 후 평생 처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나 역시 붙잡히고 말았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그들 개개인은 증오할 수 없는 소시민일지언정 명백하게 차별적인 사회 구조의 일부이고, 따라서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조총련에서 주입받은 '쪽발이는 나쁘다' 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보다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는 것.] 이들과 정반대의 인물은 사쿠라이의 아버지로, 스기하라와의 첫만남에서 자신은 국제적인 감각을 가졌다며 [[국까]]에 [[깨시민]]적인 발언을 했는데 정작 자기 딸에게는 '한국인과 중국인은 피가 더러우니까, 사귀면 안된다'고 세뇌를 시킨 사람으로, 한 사회에 만연한 차별이란 것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고 유지되는가를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보면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본작이 나온 2000년 전후만 하더라도 국가나 민족간의 갈등이 사라진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낙관적 기대감이 가득한 시대였기에 사쿠라이의 아버지와 같이 '입만 살아있는' 거만한 국제주의자들을 경멸하고 소시민 하나하나가 서로에게 공감함으로써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설득력있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2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2010년대 후반~2020년대의 일본을 보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그 불만을 재일조선인과 같은 이질적 소수자에게 돌림으로써 [[넷우익]]이 성장하고, 이것이 일본의 우경화에 동력을 공급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사쿠라이의 아버지와 비슷한 상대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가진 기득권 기성세대들이 (그들 자신이 가진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을 가로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외의 흥미로운 인간상으로 스기하라의 학창 시절 무용담에 등장하는 경찰이 있다. 조선학교에 다니던 스기하라가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데 이를 보고 순찰차로 쫓아온 경찰이 "너희같은 쓰레기는 길가로 다녀야지"라고 자신들을 모욕하자 화가 나서 페인트를 섞은 물폭탄을 차 앞유리창에 던진 것. 결국 페인트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순찰차는 길가 전봇대에 충돌하고, 잠시 후 상황을 확인하러 스기하라가 슬쩍 돌아와보니 사고를 낸 경찰은 울고 있고, 동료 경찰이 달래주고 있던 것. 이 모습을 본 스기하라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아 경찰 괴롭히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즉 스기하라는 자신의 행동을 잘못으로 인식하고 반성하여 그만둔 것이 아니다. 스기하라의 관점에서는 어디까지나 경찰이 먼저 자신들에게 시비를 건 것이고 따라서 페인트 물폭탄으로 받아친 것인데 괴롭힘을 당해도 버티고 받아치는 자신과는 달리 정작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면 훌쩍훌쩍 우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상대가 약한 인간으로 보여 '약한 놈을 괴롭히긴 싫으니 내가 봐주겠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경찰 괴롭히기의 경우 스기하라와 같은 젊은 조총련들이 북한 체제에 대해 가진 경멸감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조선학교 교과서에서는 [[김일성]]이 어린 시절부터 일제 군경들에 대항하여 골탕먹인 이야기를 일종의 영웅담처럼 가르치는데,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일본 경찰을 자주 골탕먹인 스기하라와 친구들이 보기에는 김일성의 어린 시절 활약이라는 게 자신들보다 딱히 대단할 것도 없고 오히려 자신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는 것. 즉 북한과 조총련 특유의 개인 숭배 세뇌교육이라는 것도 '''폐쇄되지 않은 사회에서 사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우스꽝스러워 보일 분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괴롭힘을 받으면, 힘들고 괴로워하는 평범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조선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자신보다 약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집단의 구성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욕하고 괴롭힌다는 것. 이 면에서 작중 등장하는 소시민적, 인간적 공감대라는 것을 단순히 '차별적인 제도나 국가는 나쁘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 미워해서는 안된다' 식의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소설은 결국 일본 사회 내에서 차별의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이고, 평범하고 연약한 보통의 일본 사람 하나하나는 이 피해자의 이해자일 수도 있지만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 말하자면 이 이야기의 지향점은 스기하라의 독백처럼 국적이라는 것이 그 인간의 본질적 가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마치 옷처럼 갈아입을 수도 있는 것임을 이해함으로써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지 차별적인 제도는 나쁘지만 소시민 개개인에게는 죄가 없으니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 한편, 정일을 죽인 일본인 학생은 불량배가 아니고 조선 학교 여학생에게 접근한 것 역시, 시비를 걸거나 희롱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일본인 학생이 조선 학교 여학생에게 접근한 건 진짜 반해서 고백하려고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자이니치 조선인으로 차별당해온 경험으로 인해 여학생의 과도한 경계심과 남학생 주변에서 남학생을 충동질하던 다른 학생들, 역시 차별을 피부로 느껴왔기에 여학생을 보호하려고 다가간 정일과 그에 대해 남학생의 돌발적인 반응 등 복잡한 상황과 오해들이 얽혀 최악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부조리]]를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개이기도 하다. * 일본인 남자 학생중에서는 스기하라의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묘사되는 카토 역시 복잡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카토는 '기념할만한 첫 도전자'로 스기하라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한방에 코뼈가 부러져 쓰러졌지만 싸움끝에 친구가 된 것인지 이후 스기하라와 친하게 지내고 있고[* 스기하라가 종종 냉랭해보일 정도로 쿨한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신경쓰지 않고 친한척 달라붙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판의 묘사를 보면 동성애적 애정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 카토의 아버지 역시 스기하라를 "그놈 대담하고 보통내기가 아니다. 나중에 큰 일을 하겠더라"며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들의 코뼈를 부러트린 보복으로 손가락이라도 잘라받을 생각이었다고는 말했지만, 사죄나 보상의 의미로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야쿠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태인데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는 재일조선인 출신이라고는 해도) 일반인 학생을 상대로 손가락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다. 차라리 치료비나 위자료 명목으로 거액을 요구하는 쪽이 [[야쿠자]]의 행태에 더 부합할 것이다. 작중 해당 내용 역시 정말 손가락을 자르라고 요구했다가 철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받고 그냥 넘어가겠다고 하는 자리에서 "원래 손가락이라도 잘라 받을 생각이었는데 한번 봐준다" 정도로 가볍게 한번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것이었으므로, 이 부분은 다행히 자식의 치료(성형수술 포함)도 잘 끝났고, 피해자인 자식도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 보복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데다 사죄하러 온 상대가 사죄는 하면서도 비굴하게 굴지 않는 모습이 당당하게 보여 썩 마음에 들기도 하다는 등 여러 이유가 겹쳐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은 상태에서 엄포섞인 농담삼아 한 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청소년간의 우정이라고 보기는 상당히 미묘하다. 카토 역시 '야쿠자 두목의 아들'이라는 입장이라 양지에서 활보하기는 어려운 처지이고, 본인도 그 처지를 이미 받아들인 것인지 자신의 생일파티를 클럽에서 열면서 그 입장권을 팔고, 방문한 남자 손님들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는 등 범죄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건실하다고 말할수도 없는 일종의 '사업'을 (아직 고등학생의 신분이면서) 벌써부터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카토가 '아버지가 너는 나중에 분명 큰 일을 할거라고 했다'면서 함께 큰 일을 해보자고 조르고 꼬드기는 것은 좋게 말하면 친구와 함께 노력하여 성공을 나누고 싶은 우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이 건실하고 떳떳한 일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이런 해석조차 주인공과 그 친구쪽에 이입한 호의적인 해석이고, 작중 다른 인물들의 생각은 또 다르다. 생일파티에 시비를 걸기 위해 찾아온 적대적 양아치들이 "존공[* 재일'조'선인과 흔히 쓰이는 개의 이름을 언어유희로 엮어 스기하라를 카토가 키우는 개에 비유하여 조롱한 것.] 뒤에 숨어있지 말고 직접 나오라"며 카토를 도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이 보기에 카토와 스기하라의 관계는 '아버지의 조직을 물려받을 예비 거물 야쿠자'가 미성년자 시기부터 수익사업을 시작하면서 재일조선인 출신 무투파를 호위로 기용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오랜 차별로 인해 사회의 주류 영역에 진출할 수 없던 재일조선인들이 두각을 드러낸 주요 분야 중 하나가 야쿠자인 것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이고, 자신은 별로 싸움질을 벌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런 재일조선인의 이미지 때문에 끊임없이 덤벼드는 상대들을 때려눕히다보니 주변의 학생 깡패들중에서도 눈에띄는 강자로 손꼽힘당하고 만 스기하라의 처지와도 관계있는 문제인 것. 결국 스기하라는 자신을 개에 비유하면서까지 모욕하는 상대를 계속 참아줄 수는 없으니 또 손쉽게 때려눕혀버렸는데, 이 사건은 주변에 알려지면 카토는 '역시 거물 야쿠자 두목을 부모로 둔 자식은 떡잎부터 다르다. 벌써부터 솜씨 좋은 심복을 두고 있다', 스기하라는 '일진들 중에서도 싸움 솜씨가 유독 빼어나더니 벌써 야쿠자 후계자하고 손을 잡고 줄을 댄 모양이다'식의 이미지가 생겨버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작 카토 자신은 이정도까지 타산적인 관계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스기하라가 서로의 처지와 입장 차이를 지적하자 충격을 받고 울듯한 표정을 지어버렸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사회적 시선과 차별에 의한 일종의 함정에 빠져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