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HJ중공업 (문단 편집) == 연혁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e Korea Shipbuilding Corporation.jpg|width=100%]]}}}|| ||<-2> '''{{{#fff 대한조선공사 시절 영도[[조선소]]}}}'''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e 1st Shipbuilding dock.jpg|width=100%]]}}}|| ||<-2> '''{{{#fff 대한민국 조선1번지}}}''' || 국내 최초의 강선(鋼船,Steel Ship) 건조 [[조선소]]. 근대적 조선소의 효시로 대한민국 조선1번지로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 자본으로 부산 영도에 세워진 '''조선중공업(朝鮮重工業)'''을 전신으로 한다.[* 1937년 초 박영철을 비롯한 4인의 민족자본가가 나서서 근대적인 조선소를 설립하려 했으나 순수한 조선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회사 설립이 어려워지자 그 당시 조선 연안 항로의 해운권을 독점하고 있던 조선우선(朝鮮郵船) 사장인 모리 벤지로(森辨治郞) 등 일본 자본가들을 어쩔 수 없이 주주로 참여시킨다. 이러한 사정은 일제강점기 하에 일본인들이 제반 권한을 독점했기 때문인데 조선중공업 역시 발기인 9명 중 한국인은 상업은행과 조선우선의 중역 2명 뿐이었고 발행한 60,000주의 주식 가운데 조선인 소유 지분은 총 5,000주로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조선중공업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투자로 설립된 회사로[* 아무래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 둘이서 합작하여 세워졌고 당연히 일본군의 배들을 만들기도 해서 [[전범기업]]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 직전에는 자본금 700만원(현재가치 8,400억원)의 규모로 성장했다. 이후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해군으로부터 발주받은 선박 12척 등을 수주 건조하며, 설비와 자본금을 증자하며 (1,500만원-현재가치 1조 8,000억원) 당시까지 조선 최대 규모인 [[조선방직]]을 능가하는 금액이었으며, 해방 직전인 1945년에는 전시특수를 누리며 자본금 3,100만원(현재가치 3조 7,000억원)의 규모로 큰 성장을 하게 된다.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한국에서 1,000톤 이상의 대형 철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중화학 공업시설은 흥남 등 북한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에, 조선•[[중공업]]은 드물게 남한 지역에 온전히 남겨진 중공업 시설이었다. 1945년 8.15 해방 뒤 일본인 경영진과 간부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자, 전 수상서 치안관 박상길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본사를 관리했으나, 대책위원회 측 횡령으로 노동자들이 노조분회를 결성 후 대책위를 축출해 자주적으로 공장을 관리했다. 그러나 미군정 출범 후 군정법령 33호에 따라 일본인 재산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는데, 조선중공업은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동양척식회사를 이어받은 군정청 산하 신한공사에 귀속되어 관리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조선공사법에 의거 1950년 1월 자본금 3억원의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했고,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며 피폐해진 경제상황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선박 수요가 저렴한 일본 중고선박의 수입으로 대체되어 발주되는 선박이 없다시피하다 보니 50년대 내내 대한조선공사는 변변한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으며, 간간히 소형선박이나 수리조선만 간신히 하는 정부의 대표적인 적자 [[공기업]]이 되었다.[* 6.25 전쟁 당시에는 큰 역할을 했다. 조선소가 부산에 위치해 있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정부 역시 전시물자 수송에 필요한 선복(船腹)의 충당이 필요했으므로 [[조선업]]을 지원했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2년 말에는 부족한 선박의 확보와 노후 선박 대체를 목적으로 자금지원과 함께 조선산업 진흥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에 힘입어 대한조선공사는 해난복구선 대야호 준공(1951년), 미국 화물선 부르트호 수리(1952년), 영국 화물선 아이리스 칸트리호 수리(1952년), 미국 상선 파크벤저민호 수리(1953년), 준설선 제1용두호(1954년) 등의 사업을 완수했다.] 막대한 원조를 해주던 미국 측에서는 조선공사의 민간매각을 종용했으며, 이에 정부에서는 1958년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폐지하고 (주)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여 주식을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하여 형태만 주식회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국가소유 공기업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 직후 재차 국영화하여 정상화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1962년 국내 최초로 공작기계(선반)를 제작 후 1968년 11월 당시 재계순위 10위권 안팎에 있던 극동해운에 매각되면서 재차 민영화됐다. 극동해운의 계열사 편입 이후 남궁연 사장은 부산 영도조선소의 설비를 확충하고, 1969년 대만으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 250톤급 어선 20척이다. 우리나라 선박 수출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했고, 1974년 미국 걸프 사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대형 수출선을 건조[* 총 6척이며 이 중 KOREA GALAXY호는 국내 최초 정유운반선이다. 국내 최초 1만톤급 이상의 대형선 수출 시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미 영도[[조선소]] 인근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조선소를 확장하기 힘들어 1972년 즈음 [[거제도]] [[옥포동]]에 [[한화오션|옥포조선소]]를 짓기로 하였으나 이듬해 1973년 [[오일 쇼크]]의 발발로, 조선업 경기가 급강하하면서 휘청거리게 되고, 옥포조선소는 결국 1978년 [[대우그룹]]에 분할매각됐다. 이후 옥포조선소는 대우조선공업(주)을 거쳐 [[대우중공업]](주)으로 합병되어 오늘의 [[한화오션]]에 이르게 된다. 옥포조선소 매각 후 1977년 사우디아라비아 TAIF 공군기지 시설 공사 및 국내 최초로 석유 [[시추선]] 건조 등을 했으며 1981년 동해조선을 인수하고 옥포기업을 합병 후 부산수리조선소를 세웠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사우디 제다에 해외 수리 조선소를 세우고, 1984년 12월 동양 최초로 수륙양용 공기 부양선을 건조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뒤로 하고 1988년 법정관리되어 1989년 조선산업 합리화 계획에 따라 [[한진그룹]]이 본사를 인수하면서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1996년 법정관리 종결 뒤 1999년 3월 경남 마산에서 경비정 등을 제작하던 중소 [[조선사]]였던 코리아타코마[* 원래 [[김종필]] 전 총리의 셋째 형 [[김종락]]이 소유했으나, 경영난으로 법정관리를 거쳐 1991년 한진그룹에 인수되었다. VLCC같은 대형 상선을 건조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상선과 군함 역사에 큰 역할을 한 회사이다.]를 합병하고, 같은 해 8월 한진건설, 한진종합건설을 합병하였다. [[건설업|건설부문]] 또한 [[조선업|조선부문]] 못지 않은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67년 설립된 대한준설공사가 1990년 한진종합건설로 사명을 변경하고, 1968년 설립된 한일개발은 1994년에 한진건설로 사명을 변경, 운영되어오다가 1999년에 당시 조선업을 영위하던 한진중공업과 함께 3개 계열사가 합병하여 '''한진중공업'''이 만들어졌다. 한일개발 시절 국내최초의 철골구조 건물인 서울 해운센터빌딩을 신축한 이래 전통적으로 공항건설 분야의 특화된 기술력과 인천 영종도, 군장 국가 산업단지, 부산 신항 배후 단지 등 준설, 항만 사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중동 및 동남아 해외건설 시장에 일찍 뛰어들어 개척자의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필리핀 건설시장에 진출한 이후 필리핀 마닐라 경전철을 비롯하여 도로, 항만 공사 등 강점으로 꼽히는 인프라 공사에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대표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내 공항시설 건설과 영종대교, 필리핀 다바오 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인천문학 월드컵 경기장, 부산 신항만 건설 등 국내외 굵직한 공사들을 수행하였다. 특히 공항 건설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실적을 자랑한다. 1971년 김포국제공항 국내선 여객청사를 시작으로 제주, 김해, 청주, 인천, 울산, 양양, 대구, 포항, 광주, 무안공항 등 대한민국에서 최다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허브공항인 인천국제공항 건설에서 최초 공사인 방조제 공사부터 부지조성, 활주로, 여객터미널, 부대시설, 접근도로 공사까지 거의 모든 공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한진중공업은 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 개항식에서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2단계 공사인 탑승동, 3단계 공사인 제2여객터미널 신축과 전면도로 공사 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에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확장 골조 및 마감공사를 수주하여 공항건설의 독보적인 명가임을 꾸준히 재확인 시켜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공공공사와 토목 인프라 공사에 강점이 있었으나 2010년에 접어들어 민간 건축과 주택사업에서도 그 영향력을 꾸준히 확장시켜 오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매년 개최되는 부산 영화의 전당을 비롯하여 부천문화예술회관, 세종아트센터 등 국내의 공연, 문화예술 시설에도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주택 사업분야에서는 2006년 런칭한 주택브랜드 <해모로>를 앞세워 정비사업 시장에서 꾸준히 수주를 이어가고 있으며 적극적인 분양 홍보 전략으로 7년 연속 초기분양율 100%라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철도차량도 제작한 적이 있었다. 여러 [[무궁화호]] 객차들과 [[DHC 디젤동차]] 일부 차량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한국철도공사 341000호대 전동차]][* 341x01~341x04편성]나 [[대구교통공사 1000호대 전동차]] 나 [[서울교통공사 7000호대 전동차]] 나 [[부산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 나 [[서울교통공사 8000호대 전동차]] 같은 도시통근형 전동차도 생산한 적이 있었다. 이후 철도차량 부문은 [[현대정공]]과 [[대우중공업]]과의 빅딜 사업으로 인해 [[현대로템]]으로 합병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VVVF]] 전동차를 제작한 곳이 한진중공업이다. 물론 [[대우중공업]]도 비슷한 시기에 VVVF 전동차를 제작했지만 구 2x30편성이 현재 341x01편성(한진중공업 제작)이라서 대우중공업이 최초는 아니다. 만약 2x30편성이 351x01편성이었다면 대우중공업이 우리나라의 첫 VVVF 전동차를 제작한 회사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2005년 [[한진그룹]]에서 계열 분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막장 드라마]]를 찍었다. 2006년 부터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물량을 빼며 그로인한 노사분규가 [[2008년]] ~ [[2012년]] 장기화되어 [[해양 플랜트]] 건설에 많이 뛰어들지 못한 게 [[새옹지마]]가 되었는지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대우조선해양]] 등이 줄줄이 신음하는 [[2015년]]에도 그리 큰 적자를 보지 않고 위기를 넘기나 했으나, 결국 필리핀 수빅조선소 문제와 조선업 불황으로 2016년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1/14/0200000000AKR20160114170300002.HTML|#]]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HIC-Phil Inc.jpg|width=100%]]}}}|| ||<-2> '''{{{#fff 한진중공업 시절 수빅조선소}}}''' || 2019년 1월 [[필리핀]] 소재 수빅 조선소가 현지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함에 따라 자본금 대비 자본총계 비율이 -140%를 기록, 완전자본잠식에 빠졌다. 수빅조선소에 대한 한진중공업의 보증채무는 4억 1,000만달러(약 4,600억원) 규모다. 결국 채권단이 6,874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출자전환하고, 대주주인 한진중공업홀딩스와 [[조남호(기업인)|조남호]] 회장 개인 소유의 지분을 전액 감자하면서 채권단이 소유, 경영하는 회사가 되었다.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www=&artid=201903091523001&code=920501|#]] 2021년 4월 15일 [[동부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컨소시엄이 한진중공업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컨소시엄은 국내 8개 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과 필리핀 BDO은행으로부터 한진중공업 발행 주식의 66.85%(5,567만 2,910주)를 사들이는 주식 매매계약을 체결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3493429|기사]] 2021년 12월에 한진중공업홀딩스와의 '한진중공업' 사명에 대한 상표권 계약이 만료되어 ''''HJ중공업'''' 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C.I.를 발표, 새로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2022년 상선 수주 증가에 따라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의 한 조선 선박블록 제작 공장을 사들여 9월 30일, 사외 공장인 'HJ중공업 거제공장'으로 [[https://www.yna.co.kr/view/AKR20220930071200052|준공]]하고 블록 제작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생산된 블록들은 조선부문 본사이자 사업장인 영도 [[조선소]]로 보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