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TX (문단 편집) == 역사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TX_개통식.jpg|width=100%]]}}}|| ||<-2> '''{{{#fff KTX 개통식}}}'''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D2jQFfd6E)]}}}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07qWQfHPMe0)]}}} || || '''{{{#fff 대한뉴스 제 1912호-경부 고속 철도 기공식}}}'''[* 대한뉴스의 지도를 보면 지금의 [[경부고속선]]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실제 경부고속선은 대한뉴스의 지도와는 달리 [[천안아산역]]과 [[대전역]] 사이 구간이 [[청주시|청주]]([[오송역]]) 쪽으로, [[경주역]]과 [[부산역]] 사이 구간이 [[울산광역시|울산]]([[울산역]]) 쪽으로 약간 꺾여 있다.] || '''{{{#fff 개통식 영상}}}''' || [[https://blog.naver.com/ldriver/30133825614|현대로템의 개통 축하 신문 광고]] 공사는 [[1992년]] [[6월 30일]]에 기공하여, [[2004년]] [[4월 1일]]에 [[대한민국의 고속열차 개발사|개통되었다.]] 기공부터 개통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장 천안 지역에 [[천안아산역|신천안역(가칭)]]에서 [[대전역]]을 잇는 시험선 34km를 건설할 때만 하더라도 기공식을 개최할 땅이 없어 임시로 땅 주인에게 땅을 '''빌려서''' 기공식 행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에는 [[1999년]]이나 [[2002년]] 개통을 목표로 했지만 사업비 예측 실패, 건설사 사정, 심지어 IMF 크리까지 터지면서 공사가 느려진 것이다. 아무튼 공사 도중 [[1997년 외환위기|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예산이 뭉텅이로 깎여버려 [[동대구역|동대구]] - [[부산역|부산]] 구간 철로는 기존 구간과 달리 값비싼 고속선[* CWR(연속용접레일)이란 것으로, 기존 철로와 달리 이음매가 없어 진동 등이 적다.]을 깔지 못하고 일반선으로 다니면서 150km/h가 넘는 속도로는 달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언급하듯이 2단계 구간이 개통된 후에도 일반선 경유 열차는 유지되고 있는데 연선 수요가 꽤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의 자금 상황으로 인해 고속철도 사업이 전면 중단되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했으니 다행. 다만 일반철로와 번갈아 운행되는 바람에 KTX의 바퀴 마모[* 약 7cm 정도 마모되면 교체해야 한다.]는 빠르게 진행되어 정비소요는 늘어났다. 일반철로와 궤간은 표준궤로 동일하지만, 바퀴가 올라가는 강철 I빔의 규격이 다르다.[* 이는 위의 디스커버리 다큐에서도 나온다.] 다만 최근에 건설되거나 건설 중인 신규철도노선이나 복선전철화 및 선형개량노선의 경우는 고속선과 동일한 레일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경부고속선 대전, 대구 도심구간의 개통으로 서울 시내구간과 일반선 경유 열차에만 한정된 얘기. 물론 대전역, 동대구역은 KTX 필수정차역[*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과거에는 [[대전역]]과 [[동대구역]]을 모두 무정차 통과하고 곧장 [[부산역]]으로 가는 편성과 동대구역만 중간정차 후 부산역으로 가는 편성이 있기는 했다.]이라 미리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다, 시내구간의 소음문제를 생각하면 경부고속선 최초 개통시 대전, 대구 도심구간이 함께 개통됐다고 해도 해당 구간을 고속으로 달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고속철도 건설을 담당했던 인물들의 회고가 담긴 책([[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72268|꿈의 실현, 고속철도 시대를 열다]])에 의하면 KTX 사업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이 유관 부서에 검토를 지시했던 '서울-대전 간 급행 고속전철 건설 방안'이 그 시초라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고속철도 사업 타당성 조사를 위해 [[IBRD]]와 프랑스 [[알스톰]], [[일본국유철도]](현재의 [[JR그룹]])가 방한했다고 전한다. 다만 이 당시의 서울 - 대전 간 급행 고속전철은 그저 한국 고속철의 겉부분이나 일부 영역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1970년대 당시 계획된 한국형 신간선이 현재의 KTX 사업에 가깝다. 당시 [[일본국유철도]]가 [[신칸센]]으로 적자 탈출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형 신간선 계획이 나왔으며 경부 신간선과 호남 신간선, 경전 신간선이 계획되었다. 말 그대로 당시 [[대한민국 철도청|철도청]]의 체질 개선을 목표로 이루어진 일련의 계획들이 현재 한국고속철도 사업의 뼈대를 이룬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NNCih4URSig)]}}}|| 차량 선정 당시 고속철도 시스템을 가진 단 3개의 국가였던 [[일본]], [[독일]], [[프랑스]]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일본]]은 당시 최신형인 [[신칸센 300계 전동차|300계]]를 한국 사양으로 개조한 커스텀 형식의 차량을 제안했었다. 차량 폭이 3100mm인 2+2 배열의 차량으로 총 좌석 수는 1000석 내외로 하고, 모터의 출력을 상승시켜 영업최고속도인 300km/h까지 나오도록 만든 차량이었다. 그러나 이는 실차가 아닌 [[베이퍼웨어]]였다. 또한, 차량 선정 당시 일본의 최신형 차량은 300계였고 300계의 최고영업속도는 270km/h에 설계최고속도는 285km/h로 자신들도 시험용 차량이 아닌 영업 차량으로는 300km/h를 내본 적이 없었다. 또한 고상홈 문제와 중검수의 한국 자체 실시에 부정적이었고, 라이센스 생산은 전부 불허하고 전량 일본 생산 후 도입을 고집하는 등 기술이전 또한 부정적인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사업 목적에 완전히 역행하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고 판단한 한국 정부에 의해 3파전에서 가장 먼저 탈락했다. 일본 측 인터넷 게시글이나 자료에서는 한국 내 반일감정 때문에 탈락했다는 주장이 많고 일부 한국 고속철도 개발사업 참여진도 그러한 증언을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틀린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의 고속열차 개발사]]를 참고하자. [[독일]]은 제안 차량이 [[ICE 2]]의 개발형이었다. 3개국 중 기술적 스펙은 가장 좋았고 기술 이전, 차관 등 각종 조건도 일본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그나마도 프랑스가 파격적인 조건을 들이밀어 탈락됐다. [[에세데 사고]] 때문에 탈락된 것이란 루머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차량 도입 계약은 1994년에 체결됐고 에세데 사고는 1998년에 일어났다. 물론 ICE 차량으로 결정이 났다면 사고로 인해 안전성 문제가 불거져 차량 도입이 늦어졌을 수는 있다. [[프랑스]]는 당시 [[알스톰]]에서 일본, 독일 대비 파격적인 수준의 기술 이전과 라이센스 생산 허용 조건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차량 도입을 계약할 때 단종된 구형 기종인 [[TGV 레조]]를 떠넘기기 식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었고,[* 정확히 따지자면 [[TGV 레조]]는 1992~96년에 생산되었기 때문에 1994년 당시에는 구형 기종은 아니라지만, 얼마 있지 않아 신형 기종을 개발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구형 기종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KTX(차량)|KTX]]가 그렇게 구형 차량은 아니었던 게, 당시 기존 레조는 물론이고 이후 만들어진 [[TGV 듀플렉스]] 차량에도 없었던 외부 행선 LED 안내판을 [[TGV]] 계열 차량 중 처음 도입했고, 일부 전장품을 듀플렉스 차량과 공용, 회생제동 추가 등 오리지널 레조보다 상당히 개량돼 도입된 차량이다. 즉, 레조에서 듀플렉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단계의 차량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 현지 기술진도 기술을 배우러 간 한국 측 기술진에게 처음에는 기술을 가르쳐 줘도 소화해 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거만한 태도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본전을 뽑아내겠다는 한국 측 기술 연구진의 끈질긴 물밑 교섭 끝에 고속철도에 대한 각종 저작권, 기술 도입 중에 새로 발견된 신기술에 대해서는 한국 측이 그 권리를 선점하는 등, 각종 유리한 조건을 모두 따오는 것에 성공했다. 당시 알스톰 사내에서도 한국 측을 너무 얕보고 계약을 해버렸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전해지면서 공장에 칸막이까지 치는 등 갈수록 방어적이고 신경질적인 태도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량을 들여오면서 프랑스 측이 제공을 거부한 기술은 사실상 거의 [[리버스 엔지니어링]]하다시피 개발해야 했던 부분도 있었다. 이 때문에 KTX가 한국으로 인도되어 들어왔을 때, 정작 프랑스 현지에서는 알스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고 실제로 알스톰 회사의 주식까지 폭락했다고 한다. 참고로 초기 도입분의 차량들은 [[1998년]] [[4월 18일]]에 [[마산항]]으로 들어왔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85695|당시 뉴스]]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훔쳐간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준다는 조건으로 [[TGV]]를 수입했다는 루머는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 [[TGV]]가 낙찰된 것은 운용 경험, 금융 조건, 경제성, 사업 일정, 기술 이전 등 여러 면에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우위를 차지했고 무엇보다도 차관 조건이 가장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은 것은 기술 이전 외에 운용 경험도 큰 이유를 차지했다. 특히 프랑스 고속철도는 한국과 비슷한 수도권 집중 방사형 체제[* 이후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기는 하지만 이 역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체제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것도 [[KTX-이음]]이 다닐 [[경전선]]과 [[동해선]], [[중앙선]]밖에 없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한국 철도망의 구조와 맥이 통했다. 당시의 한국은 단순히 차량만 수입한 게 아니라, 이와 연계되는 차량 및 선로의 유지보수 시스템까지 같이 도입했는데, 프랑스는 이런 파리 중심 방사형 고속철도망을 유지하기 위해 빠른 시간 내에 선로를 보수하고 철수하는 시스템이 발전한 반면에 전국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독일은 아예 한 구간을 틀어막고 보수를 하는 시스템이라 한국의 사정에는 맞지 않은 상황이었다. 알스톰은 자회사 EUKORAIL(유코레일. 이후 알스톰 한국 법인으로 사명 변경)을 세워 [[현대로템|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 [[LS일렉트릭|금성산전]], [[삼성전자]], [[LS전선|금성전선]], 일진 등 한국 7개 업체, 추가 프랑스 2개 업체와 한국TGV컨소시엄을 만들어 [[KTX(차량)|KTX]]를 들여왔다.[* 계획상, 동력차는 대우와 현대가 5 : 5, 보조 동력차(부스터 카)는 한진이 전부, 객차는 현대, 대우, 한진이 4 : 4 : 2로 제작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전부 현대가 제작하게 되었다. 이유는 [[현대로템|빅딜]].][[https://www.google.com/amp/s/m.mk.co.kr/news/home/view-amp/1994/04/19795/|#]]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i4u9QHo6oc)]}}}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mxzpKLDA6c)]}}} || || '''{{{#fff 산천 출시 당시 홍보영상}}}''' || '''{{{#fff 개통 10주년 홍보영상}}}''' || 어쨌든 이 기술들을 토대로 한국 측 기술 연구진들은 차기 시험 모델인 [[HSR-350X]]와 양산차인 [[KTX-산천]]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KTX-산천 1호기 출고 당시 기념으로 초청되었던 프랑스 측 인사는 [[리버스 엔지니어링|뭐 씹은 표정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는 고속철도 기술 수출 당시 핵심기술은 가르쳐주지 않는 등, 한국 고속철도 자체 개발에 불성실하고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는데, [[토사구팽|프랑스가 제공한 기술을 뽑아먹을 대로 다 뽑아내고 다음 고속열차는 강화된 제품으로 자체 생산까지 해 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후에도 400km/h대 고속열차 개발을 위한 모델인 [[HEMU-430X]]와 [[동력분산식]] 고속열차 양산차인 [[KTX-이음]]으로 더더욱 발달한 제품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쪽 역시 [[HSR-350X]]는 놔두고 아예 처음부터 새로 개발한 물건에 가까워 [[관절대차]] 같은 [[TGV]]의 흔적도 아예 완전히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