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iG-15 (문단 편집) == 개발사 == 소련은 영국, 독일과 함께 제트기의 선도국 가운데 하나였으나, 소련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MiG-9]]는 영국의 미티어나 독일의 Me-262보다 1-2년 늦은 1946년에야 나왔다. 일부에서는 소련이 독일의 기술을 가져다가 제트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1938년 아르힙 률카(Архип Михайлович Люлька)[* (1900-1984) Su-27에 들어가는 AL-31 등 여러 제트엔진을 개발한 률카 설계국의 초대 국장이다. 그가 설계한 엔진들은 Su-27, Su-24에 장착되어 21세기에도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는 세계 세번째로 [[터보제트]] 엔진을[* 최초는 영국의 프랭크 위틀이 1930, 두번째로 독일의 한스 폰 오하인이 1935년 각각 개발했다.] 개발했고, 1939년 12월에 램제트 엔진을 얹은 세계 최초의 제트복엽기이자 두번째로 개발된 제트기인 [[I-15|I-15bis DM]]가 처녀비행에 성공했으며, 1941년 4월에는 세계 최초로 [[터보팬]] 엔진을 개발했기 때문에 별일이 없었다면 소련도 독일이나 영국처럼 1943-44년쯤 제트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41년 터진 [[독소전쟁]] 때문에 제트엔진과 제트기 개발은 뒤로 미뤄졌다. 독일군의 초기공습 때문에 전멸한 소련 공군을 재건하기 위해 스타프카에서는 제트기와 대형 로켓기술 대신 기존에 생산 중인 프롭기 생산과 프롭기의 보조출력 개념으로 램제트 엔진을 장착하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소련은 승기를 잡아간 1944년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비를 하기 위해서 핵무기와 제트, 로켓 기술 등 새로운 무기체계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제트기는 [[Me 262]]의 뛰어난 성능을 체감해서 야심차게 개발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았다. 이미 전쟁 중에 금속 동체 제작기술과 금속재료 역학, 유체역학 설계 특히 시험기인 MiG-8로 후퇴익에 대한 노하우는 쌓았지만, 제트기 개발을 4년간 중단한 결과 영국이나 독일, 미국에 비해서는 기술적으로 몇 년 뒤떨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1944년에 제트엔진 개발을 명령을 받은 아르힙 률카는 1946년에 자체적인 기술로 만든 실전배치 축류식 엔진인 TR-1을 만들 정도였으니 자체 기술로는 가상적국인 미국, 영국과의 격차를 줄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독일 점령지에서 입수한 기술들은 소련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는데 BMW 003과 융커스 유모 004 엔진 공장을 압류하면서 역설계에 들어갔고 기초적인 기술력이 있어서 빠른 속도로 엔진 제작에 성공했다. 그리고 역설계한 엔진들을 [[MiG-9]]과 [[Yak-15]], [[Su-9(1946)]]을 포함해서 초창기 제트기들의 엔진으로 썼다. 하지만 문제는 원판부터 문제가 있었던 엔진이었는데, Me 262의 엔진인 유모 004는 출력은 높았으나 신뢰성에 문제[* 전쟁 말 독일 군수체계의 붕괴로 인해 레어메탈을 쓸 수 없어 생긴 신뢰성 문제 외에도, 축류식 압룩기 기술 자체가 당시로선 아직 미성숙했다.]가 있었고, BMW 003은 유모 004를 억지로 쓰던 독일군에서도 부적합 판정을 내리고 버리다시피 한 엔진이었다. 패전을 앞두고 있었던 독일에선 이 문제를 해결 할 시간이 없어 그대로 만들었지만, 전시가 아닌 평시 운용을 염두에 두던 소련에선 이런 결함을 둘 생각은 없었고, 장기적인 해결 방법으로서 자체적인 설계와 향상된 기술로 만든 엔진을 설계국에 주문했지만 언제 해결될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소련은 서방 기술 도입을 시도했다. 미국과는 전후 관계가 끊다시피 했지만,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자마자 소련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노동당(영국)|노동당]]이 집권[* 1945년 7월 처칠이 선거에 패해 수상직을 사임하고 노동당 정권 성립.]하였기에 사정이 달랐다. 처칠에 이어 집권한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은 역시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였지만, 처칠에 비하면 소련에게 상당히 유화적이었다.[* 사실 처칠은 상기한 대로 절대로 [[소련]]에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소련을 믿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처칠은 1945년 독일 항복후 [[언싱커블 작전]](Operation Unthinkable)을 통해 영국군과 미군이 유럽에 전개한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당시 작전수립의 요청을 받은 영국 육군참모부가 "3:1로 병력면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소련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포기한다.[*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이 시기 패튼이 "독일놈들이 옳았어!"라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독일이 패망 직전 '미+소+영(+불)'로 구성된 연합군 중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서방국들과만 독립적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동유럽에서 밀려드는 소련군을 독일군이 막아내겠다고 제안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영화 [[다운폴]]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물론 현실은 이미 각 연합군이 각국의 이탈 방지를 위해 겹겹의 안전장치들을 체결해 놓은 상태라 그럴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거기에 독소전쟁 이전의 독일과 우주경쟁 초기의 미국처럼 영국도 소련의 기술력을 얕보고 있었다는 것도 있었는데. 영국 측에선 소련의 기술이 낮다고 판단했고, 거기에 신형 축류식 엔진인 롤스로이스 에이본과 암스트롱-시들리 사파이어 엔진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서 원심식 엔진을 줘도 격차를 극복 못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술했다시피 제트기술이 늦은건 맞지만 기초적인 기술력이 있었으며, 언론통제가 가능한 폐쇄적인 분위기 거기에 개발주체도 국가의 간섭이 힘든 민간기업이나 대학들이 아닌 국가에서 간섭이 가능한 설계국 체제라서 외부에서는 기술력 측정이 불가능 한 상황에서 편견까지 겹치니 흔쾌히 엔진을 던져주는 우를 범하게 된다.] 애틀리는 1946년 제트 엔진 기술을 달라는 소련의 요청을 승인했다. 소련은 무단 복제가 아니라 1946년에 '''비군사용'''으로만 쓴다는 조건으로 [[영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서 '''정식'''으로 영국 롤스로이스사와 계약을 했고, 라이센스와 설계도, 시제품을 들여와서 카피했다.[* 1950년대 후반에 롤스로이스 임원들이 중국과 합작할려고 중국의 전투기 공장에 견학을 갔는데. 거기서 자사 엔진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것을 보고 소련이 계약을 어기고 제대로 로열티를 안줬다며 롤스로이스가 소송을 걸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물론 소련은 이러한 약속을 어기고 '''군사용''' 전투기에 이 엔진을 장착했고, 영국은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어찌됐건 소련 입장에서는 신뢰성이 높은 엔진이 손에 들어왔고, 유모 004 엔진을 성공적으로 역설계한 클리모프에 역설계 임무를 맡겼다. 클리모프는 롤스로이스 더웬트 V와 넨 엔진을 1년도 안 돼서 역설계에 성공했고. 특히 넨 엔진을 그냥 역설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얻었던 기술들을 총동원해서 개선한[* 더 커진 터빈과 연소실과 흡입통로 개선을 통해 22.2kN에서 26.5kN로 업그레이드 됐다] VK-1 엔진은 당시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추력을 제공한 엔진이라서, MiG-9으로 두각을 드러낸 미그의 차세대 전투기 설계에 들어갔고[* 차세대 제트 전투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한 야크 설계국에서는 새로운 설계는 커녕 기존 프롭기를 우려먹어 함량미달인 스펙을 가진 Yak-15를 내놔서 낙마했고 이후에도 그저그런 설계국으로 남았다. 라보츠킨에서도 제트기 설계에서 미숙함과 정치적 이유로 탈락한 뒤에는 미사일과 우주산업에 집중하게 된다. 수호이는 정식 설계국이 아니라서(1953년 설계국 출범) Me 262를 카피 했다.] 이 전투기는 MiG-15로 채택이 됐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mig15_13.jpg|width=10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