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Pe-8 (문단 편집) == 상세 == 30년대 중반즘 해서 소련이 보유한 [[투폴레프]] TB-3 4발 중폭격기가 구식이 되자 소련 공군에서 TB-3의 두배의 성능을 낼 수 있는 폭격기를 요구했고 1934년 7월에 투폴레프 설계국의 페틀랴코프가 개발에 착수했다. ANT-42로 명명되었다가 후에 TB-7로 명명이 되고 또 Pe-8로 명명되었다. 투폴레프와 페틀랴코프는 TB-3의 개발에도 참여했었다. [[파일:external/mig3.sovietwarplanes.com/ANT-42-prototype-1937-01.jpg]] ANT-42의 모습. 첫 프로토타입의 처녀비행은 1936년 12월 27일에 했었지만 몇년동안 더이상의 개발에 진전이 없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1937년 10월에 [[투폴레프]]와 페틀랴코프를 둘 다 [[굴라그]]에 [[대숙청|보내버렸기 때문]]. 그래서 두번째 프로토타입의 제조는 36년 4월부터 했지만 비행은 1938년 7월 16일에 있었다. 엔진의 수급과 성능 문제가 속을 썩여서 밍기적대다가 1940년대에 다시 본격적인 생산에 착수했다. 이때 개발된 바리에이션중 항공 디젤 버전이 둘 있는데, 그중 하나가 [[Yer-2]]에 쓰인 엔진과 같은 엔진을 달고 있었다.[* 이 엔진은 전후 [[IS-7]]과 신예 어뢰정들에 장착된 모델인 M-50T 모델에서 출력이 1,050hp로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페틀랴코프가 1942년에 [[Pe-2]] 추락사고로 죽자 그를 기려 폭격기를 Pe-8로 다시 명명했다. 총 93대가 생산되었다고. 이중에는 특수수송기 버전인 Pe-8ON과 폭탄창을 들어내고 내부를 호화롭게 꾸민 [[이오시프 스탈린|강철의 대원수]] 전용기 버전이 1대 있었다. 소련의 시궁창적인 상황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안타깝게 사망해버린 페틀랴코프 때문에 생산대수도 적고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지만 1942년까진 다른 4발 폭격기와 비교하면 꿀리지 않거나 폭장량과 항속거리에서 더 우월한 매우 강력한 기체였다. 독일은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4발 폭격기를 개발해놓고도 배치하지 못했다.[* 전황을 바꾸는 크고 아름다운 비밀병기를 좋아하는 독일 특성상 6발 폭격기까지 개발은 했다.] 일본은 개발을 했지만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탈리아 정도나 배치가 가능했다. 후기형에 가면 ([[La-5]]에도 장착된)[[쉬베초프 ASh-82]]를 장착한 형태가 생산되었다. 6톤의 폭장량으로 5,600km의 항속거리를 가졌고 소련의 항공기술로는 매우 강력한 기체였으나 역시 페틀랴코프의 사망 때문에 일체의 개량계획이나 후속기 개발이 취소되고 B-29의 카피인 [[Tu-4]]가 생산되게 된다.[* 페틀랴코프가 만든 기체가 [[Pe-2]]같이 소련의 열등한 항공기술로 어떻게 만들었나 믿기지 않는 고성능의 기체였다. 심지어 Pe-2는 숙청당한 뒤 굴라그에서 설계한 기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