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hide (문단 편집) === 영향력 === * 비주얼계 [[2000년]]대 이후 [[일본]] [[록밴드]]들, 특히 [[비주얼계]]에 절대적인 큰 영향을 끼친[* 비주얼계하면 생각나는 무시무시한 화장등은 [[키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애초에 X의 캐치프레이즈였던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이라는 문구는 히데가 썼다. 이 문구에서 비주얼계라는 표현 자체가 유래되었다. 워낙 비주얼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보니 "'''비주얼계는 히데에서 시작해서 히데에서 끝났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히데가 사망한 후, 비주얼계의 본래 의미가 퇴색하여 성장 동력이 급감해 '팬덤 장사하는 장르'라는 평가까지 그 위상이 하락했다. 그 예시로 [[라르크 앙 시엘]], [[GLAY]], [[LUNA SEA]] 등과 같은 초기 비주얼계 밴드들이 탈 비주얼을 선언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계보를 이으려는 [[미야비]], [[각트]] 등의 후배들이 여전히 왕성한 활동 중이다. * 사망 그의 죽음은 일본 음악계에 현재까지도 충격적 사건으로 남아있으며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1주일만에 3명의 팬들이 그를 따라서 자살해버렸고 60여 명이 입원을 하였으며 200여 명에 달하는 팬들이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의 파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문화교류가 단절되어 있던 한국에서도 끊임없이 일본문화를 다룬 다큐에서 그의 사망과 관련된 뉴스가 연일 보도될 수준이었다. 어느 수준이었냐면 일본의 전설적인 락밴드 출신 기타리스트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런 식으로 다큐나 신문과 같은 미디어에서 연일 보도될 수준이었다. 한일간의 제대로 된 문화교류가 2000년대 초반에서야 시작되었고 당시 일본문화는 베일에 쌓인 저 너머의 무언가임을 생각하면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엄청난 수준이었는지 알만하다. 만약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제(1998년)보다 더욱 빨리 이루어졌다면 hide의 죽음으로 한국인들이 받았을 충격은 더더욱 커졌을 것이다. 5월 7일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는 무려 5만여 명에 달하는 팬들이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서 그를 추모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닐 슈트라우스(Neil Strauss)는 이 현상을 보고 "지난 몇주간 일본의 대중문화는 히데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모든 것이었다."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일본 록의 거대한 아이콘인 X JAPAN의 해체와 히데의 죽음은 신드롬처럼 록 씬에 전방위적 반향을 일으켰고 [[1998년]], [[아무로 나미에]], [[DREAMS COME TRUE(밴드)|드림스 컴 트루]], 쿠보타 토시노부 등에 의해 주춤했던 제이 록이 중흥기를 맞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X JAPAN 내에서도 큰 존재감과 인기, 솔로 활동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남겼기에, 딱히 비주얼계 후배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존재[* 실제로 한국가수들 중에서도 히데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수 존재한다.]이며 공공연하게 인정받은 따뜻한 성품도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덕목 중 하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