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경제 (문단 편집) == 평가 == 청나라는 건륭제 시기에 국력이 정점에 달했지만, 건륭제 말기부터 싹튼 쇠퇴의 조짐이 가경제 치세 하에서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났다. [[백련교도의 난]]이 터지며 청나라의 오랜 평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전국에서 반란들이 연이어 터지며 청나라의 통치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다. 한편 지나치게 지속된 평화로 인해 군대는 날로 기강이 해이해져갔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국고는 말라갔으며 국력은 갈수록 약해져만갔다. 게다가 서양 열강들이 일부러 중국 내부에 강력한 마약인 [[아편]]을 유통시키면서 사회는 썩어들어갔고, 은의 유출이 심화되며 경제는 무너져갔다. 다만 그의 시기까지만해도 청나라는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들 중 하나였으며[* 서구 열강에 비해서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 이후의 황제들의 시기처럼 국가가 완전한 개막장으로까지는 치닫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시기에 청나라가 쇠퇴하기는 했지만, 가경제 본인은 게으르거나 암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매우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임금이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선대 황제들의 전기를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봤고, 그들을 본받아 성군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하여 건륭제 재위 후반부터 약화되던 황권을 다시 강화하고, 아버지 건륭제처럼 놀러다닌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옹정제처럼 지방관료들과 서한을 주고 받는 주필(붉은먹 서한) 제도도 부활시키는 등, 열정적으로 국정에 임하였다. 정부는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농민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금도 깎아주고 부패 근절에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대단히 도덕적이고 원리를 중시했다. 본인 스스로가 유교적 인의를 신조로 삼았기 때문에 옹정제식의 공포정치도 자제했고, 건륭제가 수많은 선비들을 잡아 처형했던 [[문자의 옥]]이라고 불리던 검열도 폐지했다. 또한 유교 통치자의 덕목중의 하나인 신하들이 말하는 쓴소리 (간언) 역시 주의깊게 들었다. 당시 가경제는 대신으로서 이름난 학자이자[* 인구폭증이 민생의 악화로 이어질 것을 거의 유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청나라 관료였다.] 시인이기도 했던 홍량길이 건륭제 실록(고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건륭제 말기의 타락을 비난하는 기사를 넣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효심이 지극한 가경제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건륭제 시절 같았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황실이나 전임황제를 비난하는 것은 구족이 멸족될 죄였으나, 가경제는 중국의 서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리 강|일리]]로 유배를 보내는 선으로 마무리했고, 이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100일후에 사면해 주었다.[* 홍량길은 시재로 유명했고, 그 자손들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출세한 사람이 많았다. 그 증손자인 홍심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유명 극작가였고, 그 자손중의 한명이 [[홍금보]]이다.] 가경제는 인(仁)의 군주를 자처하였으며 이후 전개되는 백련교의 난과 아편의 확산 역시 최선을 다해 막으려 힘썼다. 유교 이념 보급과 공자 숭배를 강화하여 건륭제 말기의 향락풍조도 일소해 사상적인 해이도 바로잡으려고 했다. 다만 강희제처럼 희대의 명군은 아니었고 옹정제 같이 서릿발같은 결단력이 없었으며 건륭제와 같이 시대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노력은 별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본인 스스로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청나라의 구조적 개혁없이 과거 통치기구를 사용하는 그의 노력만 가지고는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구할 수 없었다. 가경제의 전 시대인 강옹건성세가 지나치게 찬란했기 때문에 그에 묻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만 가경제 본인은 도광제 이후의 비중없는 암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군주라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치세에 일어난 큰 사건들은 어느 정도 수습하기도 했다. 어쨌든 상황이 좋을 때인 강희제나 옹정제 다음에 바로 제위를 이었다면 성군 소리를 들을만한 재목이었으나, 청나라의 내외적 상황은 너무 안좋았다. 그의 치세에 사천성-호북성 산악지역에서 끈질지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데 10년이나 걸리며 국고는 텅텅비었고, 게다가 영국이 들여온 아편은 청나라 정부 뿐만 아니라 청나라 백성들의 신체적 육체적 건강에 치명타를 가했다. 가경제는 위기에 빠진 청나라를 구하기 위해 매우 노력을 많이 했지만 강건성세를 가져온 청나라의 제도가 너무 낡은 것이 문제였다. 위기를 구하려면 통치와 국가 구조 전반에 대대적인 개혁을 했어야 했지만, 가경제는 옛 제도로 계속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별무성과였다. 그러다보니 중국의 역사학자 옌충녠(閻崇年)은 가경제를 일컫어 근면하였으나 그 능력이 펑범하였고 쇠퇴해가는 나라를 안정시키기엔 부족한 지도자였다고 평하였다. 일각에서는 가경제 시기가 청조에 있어서 중흥을 이룰수 있었던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 평하나 사실 이쯤 되면 청나라의 사회 문제와 동서양의 국력 격차가 이미 답도 없게 커진 시점이라서 가경제가 실질적으로 할수 있는건 사실상 없었다. 당시 청나라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지나친 인구 과잉과 그를 뒷받침 할 농업 생산력의 부족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는 가경제가 화학 비료라도 발명하지 않는 이상 답을 도저히 찾을수 없는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서양에서 서서히 유입되어 오는 [[아편 전쟁|아편의 문제]]와 이를 막을수 있는 '''군사력'''의 부재인데 [[가경제]] 시대쯤 되면 '''이미 유럽과 중국의 국력 격차가 너무 심각하게 벌어져 있어서''' 가경제 개인이 해결할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청나라]]는 외형상 세계 최강대국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형상 그랬을 뿐이고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한테 심각하게 뒤떨어져 있었다. 기초 과학이나 각종 기술에서 엄청나게 뒤떨어진건 물론 청나라가 자랑하던 압도적인 부마저 유럽에 비할바가 아니었는데 청나라의 최전성기라 여겨지던 [[옹정제]], [[건륭제]] 시절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보다 많은 재정 수입을 기록했고,[* 1750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연간 재정 수입은 은 1612톤, 영국은 1370톤, 청나라는 1229톤이었다.] 이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져서 아편 전쟁 직전 영국은 청나라의 5배에 달하는 재정 수입을 굴리고 있었다. 이는 유럽이 전통적으로 중국이 강하다고 여겨진 행정 분야에서도 청나라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봤을때 동서양의 격차는 더욱 명확했는데 이미 [[17세기]]부터 유럽이 중국을 포함한 비유럽을 군사적인 기술에서 압도하기 시작한 반면 가경제기 청나라는 잘 쳐봐야 [[명나라]] 시절의 무장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화약 무기 같은 분야에선 오히려 퇴화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평화에 찌든 결과 청나라의 군사력은 한족 농민군 따위에 쩔쩔맬 정도로 답도 없이 타락한 반면 유럽은 전세계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치룬 끝에 그 어떤 대륙도 도달하지 못한 조직력과 전술의 경지를 달성한 상태였다. 실제로 [[청나라]]군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게 잘 무장하고 유럽식 편제를 갖췄으며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인도[* 당시 인도의 거의 모든 왕국들은 유럽과의 지속적인 교류 덕에 유럽과 맞먹는 수준의 무장을 자랑했고 그 중 [[마이소르 왕국]]은 로켓으로, [[마라타 제국]]은 프랑스식으로 훈련 받은 막강한 포병대로 영국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비록 당시 인도가 분열된 상태였다고 하나 인도의 엄청난 인구 덕에 그 분열된 왕국들조차 각각 수천만에서 수억에 달하는 체급을 자랑했고, 세계 최대의 면직물 산업 덕에 재정적으로도 청나라에 비해서 부족할 게 없었다.]조차 한줌에 불과한 영국군에 자주 발린게 건륭제 시절 18세기였고, [[나폴레옹 전쟁]]을 치루면서 안 그래도 벨붕급으로 강했던 군대가 더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 가경제 사후 20년도 안되서 벌어진 [[아편 전쟁]]에서 수십만 청나라 대군이 2만 남짓의 2선급 영국군 병력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한채 녹아내려 버렸다.[* [[제1차 아편전쟁]]에 동원된 영국군의 대부분은 영국식으로 훈련된 인도 현지 보조병인 세포이였다. 세포이도 인도를 정복한 강군이었지만 영국 본토의 정예 병력 비해서는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이토록 쓰지도 못하는 덩치만 컸던 중국이 문명 레벨에서 차이가 나는 서양을 단기간에 따라잡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따라서 [[가경제]]가 아니라 [[옹정제|가경제 할애비]]가 다시 집권 했어도 청조의 [[중흥]]을 이루어냈을 확률은 사실상 없다. 한마디로 가경제는 자신의 위치에서 당시 중국인의 상식 선에서 할 수 있는건 모두 했었다. 단지 그가 마주해야 했던 문제들이 몇백년은 노력해도 될까말까 하는 희대의 난제들였을 뿐이다. 이처럼 가경제 시기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민족 - 민중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 사회 혼란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으며, 거듭되는 [[아편]]의 밀수로 인해 재정 불안이 시작되고, 부패한 관료와 귀족층의 무능과 타락으로 제국의 붕괴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가경제가 죽은 후 [[도광제]]의 대에 이르면 [[아편전쟁]] 등으로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