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경제 (문단 편집) == 즉위 전 == 건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서, 생모는 영의황귀비 위가씨[* 위씨 성의 요동 한족 출신 정황기 포의 가문에서 태어나 입궁했다. 본인은 황귀비 시절 사망했지만, 후에 일족이 만주족 가문들과 비슷한 위가(魏佳)씨로 사성받고 양황기 만주 기분 니루로 대기되었다. 나중에 건륭제가 [[효의순황후]]로 추존한다.]이다. 그가 건륭제의 후계자로 낙점되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건륭제가 처음으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효현순황후]] 소생의 차남(적장자) 단혜태자 영련(永璉)이었다. 영련은 효현순황후와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태자밀건법에 의해 후계자로 정해졌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이에 건륭제는 슬퍼하면서 대신들을 모아놓고 후계자 밀지를 공개한 후에 태자로 추봉하였다. 건륭제가 두 번째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7남 영종(永琮)이었다. 영종 역시 효현순황후의 아들이었으나 일찍 죽었고 건륭제는 영종을 후계자로 낙점했었음을 공표한 후에 철친왕(哲親王)으로 추봉하였다. 이후에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하기 전까지 후계자를 누구로 했느냐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영종이 사망한 시점이 1747년이고, 후일의 가경제가 되는 영염이 태어난 시점이 1760년이다. 영염이 태어나자마자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할지라도 13년의 후계자 공백이 남는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했을 때, 장년으로 접어든 건륭제가 이 기간 동안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보인다.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1748년 효현순황후가 사망했을 때, 건륭제는 서장자였던 영황(永璜)과 3남 영장(永璋)에게 국상 중에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으며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물론 영황과 영장 역시 건륭제보다 일찍 죽었다.] 4남인 영성(永珹)과 6남 영용(永瑢)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내어져서 후계자 대열에서 탈락했음을 알 수 있다. 1748년 당시 7남 이하는 어리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5남 영기(永琪)가 이 기간 동안 잠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건륭제의 아들 중 최초로 화석친왕의 작위를 얻은 점과 영기의 생존기간 동안은 그가 건륭제의 아들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기 때문이다. 건륭제 역시 옹정제 재위기간에는 형제 중에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고, 도광제 역시 가경제 재위시에 형제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다. 대체적으로 후계자에 근접해 있는 아들들이 친왕의 작위를 얻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료에서 보이는 건륭제의 영기에 대한 총애와 영기의 능력(특히 만주어 구사 능력과 무예 등) 등은 가경제가 후계자로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영기가 건륭제의 후계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5남 영친왕 영기(榮親王 永琪) 또한 1766년 사망했고, 이 해에 [[계황후|계황후 휘발나랍씨]]도 모종의 이유로 건륭제에게 미움을 받아 유폐되었다. 계황후의 아들이었던 12남 영기(永璂)는 황후 출신의 적자로서 후계자에 선정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모친의 유폐로 입지가 불안하게 되었으며 건륭제보다 먼저 1776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계황후 대신 새 황후를 두지않고 총애하는 영염의 생모인 영귀비 위씨를 황귀비에 책봉해 후궁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볼 때 건륭제는 영귀비를 황후에 올리고 싶었으나 한족 출신(한군팔기)인게 문제여서 황귀비에 봉하고, 이때부터 영귀비 위가씨 소생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95년 당시의 건륭제의 살아있는 아들들은 8남 영선(永璇), 11남 영성(永瑆), 15남 영염(永琰/가경제), 17남 영린(永璘) 등 4명 뿐이었다. 이 중 친왕에 책봉된 아들은 11남 영성(성친왕)과 15남 영염(가친왕)이었다.(1789년에 동시에 화석친왕에 책봉). 건륭제는 영성과 영염을 정무에 참여시켰고, 8남 영선은 일처리를 못하고, 17남 영린은 여자를 밝히고, 11남 영성이 무예를 싫어하고 문약하고 결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건륭제와 대신들의 신망은 15남 영염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이때 만약 11남 영성이 태자로 책봉되어 황제가 되었다면 그의 어머니가 조선인 혈통의 긴기야씨였기 때문에 이후 청나라 황제들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1795년 9월, 건륭제는 영염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듬해 염염이 36세가 되었을 때 제위를 물려주었다.[* 무엇보다 가경제가 효심이 매우 깊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건륭제와 어머니 위가씨에게 효성을 다한 효자였다. 특히 가경제는 할머니인 효성헌황후에게도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효성을 다했기에 효성헌황후가 가장 아끼는 손자인 터라 이는 효성헌황후에게 효자였던 건륭제의 환심을 산 것이다.] 즉, 가경제는 유일하게 어머니가 한족인 청나라 황제이다.[* 강희제의 어머니인 효강장황후가 조상이 한화된 여진족이었다가 누르하치 때 다시 만주족으로 돌아왔기에, 순수 한족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매우 다르다. 원칙적으로 만주인은 한족과 결혼할수도 없고, 황족들도 원칙적으로는 한인은 첩으로도 둘수 없었다. 호적에 올리려면 팔기군 한군기인으로 신분을 올려줘야 했다.] 사실 건륭제는 89세까지 살며 현재 기준으로도 꽤나 장수했고, 더 오랫동안 재위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61년 재위 기록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60년째 되는 해에 양위한 것이다. 다만 건륭제는 양위한 이후에도 죽기 전 약 3년 동안은 [[인세이|상황으로 군림하며 가경제를 제치고 막후의 실권자로 남아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