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경제 (문단 편집) === 민생 악화 및 반란 === 먼저 건륭제 말기의 민생악화에 대한 원인으로 건륭제의 무분별한 원정과 사치로 청나라의 재정을 탕진해서 농민생활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도 물론 한 원인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청나라의 인구증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강희-옹정-건륭 대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미에서 들여온 고구마와 옥수수와 같은 구황작물로 인구가 폭발[* 강건성세 시기 동안 100년간 1.5~2억에서 3~4억으로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났다.]하여 민생이 매우 어려워졌다. 오히려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에 내정이 안정되며 소금세와 서양과의 교역확대로 인한 관세에서 재정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재정은 튼튼한 편이었다. 하지만, 건륭제 시기에 인구가 폭증해 농민생활이 어려워졌고, 그때문에 건륭제 말기까지도 재정은 그럭저럭 버텨갔으나, 건륭제 말기에 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 가경제 시절까지 이어지면서 그 진압비용으로 재정이 탕진된 것이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소수의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겸병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무거운 소작료를 내지 못한 빈농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전에 인구가 거의 없었던 산악지역에 흘러들어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현실의 곤궁함을 잊기 위해 미륵신앙을 신봉하는 백련교에 빠져들었고, 백련교는 세력이 확대되자 청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호북성-사천성 산악지역에서 1796년 폭발한 [[백련교도의 난|백련교(白蓮敎)의 난]][* 1796년 반란의 주동자는 반란 모의 혐의로 처형당한 제림의 아내인 왕총아였다. 백련교도들은 호북성-사천성 경계의 산악지역에서 숨어 관군을 치고 빠지는 전법을 썼다.]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 1805년까지 약 10년이나 계속되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백은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관중과 호광(湖廣) 일대의 농지와 향촌 질서가 일거에 붕괴하여 내륙 지방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농민 반란 진압에 10년이나 애를 먹으면서 민심의 이반이 명확해졌으며, 막대한 전비(戰費) 지출은 [[19세기]] 내내 청나라를 괴롭힌 재정 파탄의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이 전비지출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지불한 보상금인 2100만냥보다 10배나 더 많다. 그러니까 아편전쟁에 낸 배상금조의 전비를 10년간 매년 백련교도 진압에 지출하고 있었다.[* 이것이 니오후루 허션이 팔기군을 약화시킨 탓도 있지만, 사실 기병이 중심이 된 청나라군은 산악이나 밀림지역의 [[게릴라]]전에는 매우 약했다. 건륭제 시절 평원인 서역에서 막강한 [[준가르]]의 철기병을 분쇄했던 청나라군이, 밀림지역인 베트남과 미얀마에서는 맥없이 패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간신히 진압된 백련교의 반란은 1813년 이문성, 임청 등이 이른바 '천리교(天理敎)'라는 이름을 걸고 재발했는데[* 참고로 일본에서 생겨서 현대 한국에도 신자가 있는 [[천리교]]와는 이름만 같고 관계가 없다.], 직예, 하남성, 산동성 등 북방 지역의 64개 현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일시에 위세를 떨친 천리교는 이문성을 천왕으로, 임청을 문무성인으로 추대하고 세력 확장을 꾀했다. 북경 황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첩보를 들은 가경제는 너무 놀라 직예총독 온승혜와 하남순무 고기 등에게 진압을 명했다. 그런데 이 반란 때 천리교도들은 관군이 북경 수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왜냐면 북경과 가까운 지역인터라 북경의 수비병력들까지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관군으로 위장해 미리 포섭한 환관의 인도를 받으며 '''고작 70여 명이 [[자금성]]을 습격'''했다. 가경제는 승덕의 피서산장에 있었으므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자금성 습격은 황궁의 남서방에 있었던 가경제의 둘째아들 민녕과 친왕들이 황급히 금위군을 소집하여 가까스로 진압했다.[* 이때 태자였던 [[도광제]]가 권총을 쏘면서 직접 군을 지휘했다고 한다.] 가경제는 심각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특히 수도 근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자객들이 황궁까지 쳐들어와 황제 암살을 시도한 것 자체가 보통 큰 사태가 아니다.], 변란을 당하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우변죄기조를 반포했다. 한편 한족 농민의 반란 외에도 가경제의 치세에는 소수민족들의 반란도 빈번하였다. 가경 2년 정월 포의족의 왕낭선(1777~1797)이 귀주성 남롱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왕낭선은 19세에 불과한 처녀였으나 무술에 능하고 신통력으로 병을 치료하는 선녀라는 소문을 퍼뜨려 귀주성에 거주하는 포의족, 묘족, 이족 등 남방 소수민족들의 여신이 되었다. 그녀가 이끄는 반란군은 불과 몇개월만에 보평, 흥인, 자운, 장순, 직금 등을 점령하고 귀주성의 수도 귀양까지 진격할 정도로 청나라 조정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가경제는 운귀총독 늑보(1739~1819)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결국 늑보의 청나라 관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한 왕낭선은 포로가 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으며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능지처참을 당했다. 청나라는 왕낭선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청나라가 가진 서남지방의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이미 1726년 ~ 1729년, 1746년 ~ 1749년, 1758년 ~ 1759년, 1781년 ~ 1784년에 잇따라 폭발한 바 있는 [[이슬람교]]도와 [[쓰촨성|사천]](四川) 일대의 소수 민족 봉기는 점점 격화되어 1795년 ~ 1797년의 [[묘족]] 반란과 1833년의 2차 묘족 반란으로 가시화되었고, 1807년에는 [[티베트]]족의 봉기가 터지기도 했다. 이는 변경 지대에서도 청나라의 통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