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남풍 (문단 편집) == 생애 == 가남풍은 원래 검은 얼굴에 키가 작달막한 추녀라고 얘기되는데, 그 일화는 《진서》에 소개되어 있다. 후에 세상에 보다 잘 알려지게 된 이유는 [[당(통일왕조)|당]]나라 현종 시절에 이한이 지은 《몽구》에 세세하게 설명하면서부터였다. 이를 짤막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진무제 [[사마염]]이 태자비를 고를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위관]][* 이것과는 크게 연관이 없겠지만 건국공신인 위관은 후에 가남풍에게 조종당한 초왕 [[사마위]]에게 암살된다.]과 가충의 딸을 두고 저울질을 할 때였다. 최종적으로 위관의 딸을 고르고자 신하들을 불러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위씨의 딸은 풍채가 크고, 살이 희고 고우며, 위씨의 집안은 대대로 지혜로워 그의 딸 역시 어질고 지혜를 겸하고 있다. 반면에 가씨의 딸은 키가 작고, 피부는 검고 거칠며, 상이 좋지 못하다. 경들은 어떠한가?" [[가충]]은 자신의 딸이 위관의 딸보다 어질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처 [[곽괴]]가 [[무원황후]] 양염에게 뇌물을 먹여 권신인 순의와 순욱을 움직이게 했다. 순의와 순욱은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므로 미인이 황태자비가 되면 후에 바람날 것이지만, 지독한 추녀인 가남풍은 자기가 추녀임을 알고 있으므로 백치 남편에게 만족할 것이라며, 가남풍이 더욱 좋다고 진무제를 설득하였고 결국 진무제는 가남풍을 훗날 진혜제가 되는 [[사마충]]의 태자비로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순의와 순욱의 주장과 달리 후일 이 백치 남편에게 만족못한 가남풍은 애인을 두었다.|| 원래 가남풍의 [[여동생]]이자 사마충보다 한 살 어렸던 [[가오(서진)|가오(賈午)]]를 태자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가오는 나이가 어려서 성인 옷을 입지 못했기에 가남풍이 내정되었다. 그래도 권신이었던 아버지 [[가충]] 덕에 270년인 당시 15세의 나이에 사마염의 [[아들]]인 13세의 [[사마충]]과 [[결혼]]했는데[* 이때 가남풍의 유모 [[서의]]도 같이 궁에 들어왔다.] 질투가 심해 손수 몇 사람을 죽였고 임신한 시첩에게 창을 던져 그 아이가 칼날에 맞아 유산한 일도 있었다. 이에 사마염이 화가 나서 낙양 북서쪽에 있던 금용성을 수리하고 가남풍을 폐비시켜 그곳에 유폐하려고 했지만 순욱, 풍담, 양요, [[조찬(서진)|조찬]] 등이 "어려서 저러는 거고 나이 먹으면 알아서 나아질 거다"라며 말려 폐비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한 황자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고 어리석은 인물이라[* 《삼국지》에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판단력이 떨어지는 인물은 [[유선(삼국지)|유선]]이나 [[하후무]] 등 많이 있지만 이들이 적어도 정상인의 지능은 가지고 있었던 반면, [[사마충]]은 아예 지적장애 3급 정도의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 사마염이 나라를 망칠까 불안해서 아들보다 자기 동생인 제왕 [[사마유]]에게 권좌를 물려줄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은 마음을 정해 청주로 사마유를 내쫓았고 사마유는 가는 도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마염]]은 나라를 맡길 만한지 시험이라도 한 번 보게 해야겠다고 생각해 [[사마충]]으로 하여금 시험치게 하자 가남풍은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장홍에게 [[뇌물]]을 먹이고 시험답안을 대신 쓰게 해[* 물론 백점 만점짜리 답안을 써 주지 않고 간신히 낙제를 면할 수준으로 써 줬다. 왜냐하면 사마충의 머리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백점짜리 답안을 써 내는 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백점 만점짜리로 써 줬다가는 대필해 준 게 곧바로 들킬 것이니까.] 황제를 속여 안심시키고 [[사마충]]을 정식 황태자로 인정하게 만든다. 거기다 사마충의 아들이자 황손 [[사마휼]]이 총명한 것을 보고 사마염은 안심하고 말았다. 사마염이 죽고 290년에 사마충이 황제가 된 뒤 선제의 외척인 [[양준(서진)|양준]]이 국가대권을 쥐자 291년에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에게 밀서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올라오게 해 양준과 그 일족을 죽였으며, 사마위를 영태자소부로 임명했다가 [[토사구팽|모함을 씌워 죽이고는]] 마침내 나라의 대권을 차지했다. 여기에다 양준의 딸인 의붓시어머니[* 고부관계였지만 나이는 며느리인 가남풍이 3세 연상이였다.] 무도황후 [[양지(삼국지)|양지]]를 폐서인하고 친모인 방씨와 함께 영녕궁에 감금했다가, 이후 방씨를 처형했다. 양지는 어머니를 구명하고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통곡하면서, 시어머니 체면에 며느리에게 '소첩'을 자칭하고 머리를 조아려 가며 어머니를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가남풍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방씨가 처형당한 뒤 절망한 양지는 곡기를 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이 일도 가남풍이 대단히 배은망덕한 일을 한 것인데, 태자비 시절 가남풍의 투기가 매우 심해서 사마염이 폐서인하려 하자 양지가 이를 말리고 가남풍에게는 행실을 반듯하게 하라고 여러 번 권고했기 때문이다. 가남풍은 이게 자기 자리를 지켜주고 도와준 것인데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황후가 무제에게 참소해 자신을 깎아내리는 줄 알고 원한을 품어서 이렇게 잔인한 처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또 양태후가 굶어죽고 나니 무섭긴 했는지, 저승에서 선제에게 호소할까 두려워 시체를 거꾸로 엎어서 빈소를 차렸고 귀신 쫓는 부적과 약물 등을 쓰기도 했다. 남편인 황제는 어리석은 백치였으므로 가남풍은 저잣거리의 미소년이나 절륜한 무관, 궁중 의원들과 놀아나며 음란한 사생활을 즐겼다. 미소년들은 밤에 몰래 거리에서 납치해 침실로 데려와 즐긴 뒤 목 졸라 죽여서 상자에 넣어 강에다 버리곤 했다고 한다. 이런 행실이 얼마나 심했는지 정략적으로 가남풍과 협조 관계였던 가모, 배위, 장화 등이 괴로워하며 고뇌할 정도였다. 한 번은 그들이 가남풍을 폐위하기 위해 의논했지만 사마충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 그만두었다. 관련 일화로, 낙양성 남쪽의 어느 [[미소년]]이 가남풍에게 끌려갔는데 가남풍이 그를 특히나 아껴 죽이지 않고 비싼 선물들을 주며 풀어줬다. 그런데 그 소년이 갑자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자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가남풍이 드물게 살려준 이로 알아채서 풀어줬다고 한다. 299년에 산기상시 가밀이 동궁에서 강의할 때 태자([[사마휼]])에 대해 오만하게 굴자 성도왕 사마영이 이를 보고 질책했고 가밀이 화가 나서 이를 얘기하자 사마영을 쫓아내 평북장군으로 업을 지키게 했다. 가밀은 태자 사마휼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반역의 뜻이 담긴 글을 쓰게 했다가 그 글로 모함해서 사마휼을 폐태자로 만들었다. 이후 가남풍은 사람을 시켜 사마휼을 죽이려다가 죽지 않자 약 찧는 절구로 때려 죽였다.[* 덤으로 사마휼의 모친 [[사구(삼국지)|사구]]도 죽였다.] 태자 사마휼이 살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황족들과 제후들이 일제히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300년, 마침내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이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입성해 가남풍을 붙잡아다 폐위시켰다. 가남풍은 멀리 있는 혜제에게 “폐하께서 아내를 두셨다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폐위시키려 하시니, 폐하께서도 곧 폐위될 것입니다.”라고 외쳤고, 끌려가는 도중 사마경에게 "누가 계획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사마경이 "양왕과 [[사마륜|조왕]]이오."라고 답하자 가남풍은 "개를 묶어 둘 때에는 마땅히 목을 줄로 묶어놓아야 하는데, 도리어 꼬리를 묶어 두었으니 어찌 그렇게 되지 않으랴!”라며 한탄했다. 여름 4월 9일에 사마륜은 조서를 위조해서 가남풍에게 독인 금설주를 마시고 자결하도록 했다. 이때 가남풍은 독약을 강제로 마시게 되었고 사마륜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녀의 일족은 멸족당했고 이 반란이 [[팔왕의 난]]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사망할 당시 가남풍의 나이는 44세였다. 아들은 없었으며 딸만 다섯 있었다. 가남풍이 주살된 후에는 상서우복사 양현지(羊玄之)의 딸 양씨([[양헌용]])를 황후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