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남풍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이처럼 죽은 뒤에 온갖 [[욕설]]을 다 먹는 가남풍이지만 역사서에서 보면 이렇다. "비록 암주(혜제)와 학후(가남풍)[* 암주와 학후는 사마충과 가남풍을 지칭하지만 둘의 시호가 아니다. 암주(闇主)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을 말하며 학후(虐后)는 '사납고 모진 황후'를 뜻한다. 참고로 사마충의 시호는 혜황제. 다만 저 '혜'라는 시호도 전혀 좋은 의미로 주어진 시호는 아니었다.]의 조정이라고 간주하기도 하나, 천하는 이와 같이 편안하였다."라는 기록도 있고, 의외로 백성들 살기에는 좋았다는 얘기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양비론|이때의 백성들은 누가 왕이 되든지 간에 전혀 상관없었다.]] 왕이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 바뀌는 것뿐이고, 그 왕이 자기들을 괴롭히지만 않으면 폭군이든 암군이든 간에 어지간해서는 묵인했다.'''[* 여담이지만, [[노자]]는 이런 왕이야말로 최고라고 극찬했다. 최악은 백성이 욕하고 신음케 하는 왕이요, 그나마 나은 왕이 백성이 칭송하는 왕이고, 가장 나은 게 왕이 뭘 하든 백성이 신경을 안 쓸 정도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는 왕이라고 했다. 사실 선대의 진무제 사마염도 유교 원리에 의해 통치한다고 해도 무위를 은근히 강조한 편이긴 하다.] 물론 태평성대라 백성들이 신경 쓰지 않는 것과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쁜 난세라 왕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또한 혼란의 시기일수록 종교 문화가 발달하였으니 이것도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다만 중국의 많은 왕조에서 황제 자신의 위세 과시나 유흥을 목적으로 과도한 증세를 시도하거나 지나친 부역을 부과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암군들이 적지 않았던 걸 보면, 적어도 저 문구는 가남풍 시절에는 그런 학정이 없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대형 사업은 거의 없었다. 즉 백성들만큼은 착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가남풍을 황족 제후들과 외척들로부터 황권을 굳건히 지킨 여걸로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황의 유조까지 숨기며 황궁을 차지하고 앉았던 권신 [[양준(서진)|양준]]을 제거하며 등장하였고, 정적을 적절히 제거하며 [[사마충]] 같은 바보 황제의 제위를 꽤 오래 지키게 해 준 것도 정치적 감각 없이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진의 정치는 꽤나 불안했다. 사마소가 조모를 시해한 바람에 사마진의 건국명분은 진작에 없어진거나 다름없었고 그나마 촉한 정벌로 어거지로나마 명분을 만들어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웠지만 조모를 시해한 여파로 황제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황제가 문벌귀족들의 눈치나 보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문벌귀족들이 폭주를 거듭하는데도 사마염은 말리지도 못했다. 여기다가 사마염은 조위의 실책을 교훈삼는다고 사마씨 황족들에게 크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일단 이렇게 힘이 실린 황족들 중 1명이 후일 사마진의 명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멀리 보면 좋은 면도 있었지만 가깝게는 이렇게 힘 실린 황족들이 널렸다 보니 사마충 같은 사람이 혼자 통치했다간 황족들 다툼에서 이리저리 휘말이기 딱 좋은데 이 상황을 뚫어내고 그래도 10년 가까이 정권을 유지한건 정치적으로 아주 맹탕은 아니란 의미가 된다. 실제로 가남풍 사후 서진의 실권을 잡은 이들은 모두 가남풍만도 못한 기간동안 정권을 잡았다.] 또 시기마다 인재 기용을 대단히 안정적으로 한 점도 놀라운 장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남풍은 여남왕 [[사마량]]이나, [[위관]], 장화 등 명성과 식견을 두루 가진 정치가들을 적시에 기용하곤 했다. 심지어 제일 황당한 건 인재 기용은 대체로 아주 반듯한 인물 위주로 했단 점이다. 더구나 장화는 가남풍의 아버지인 [[가충]]과는 철천지원수지간이었다. 네 편 내 편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여줄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더라도 올곧은 사람을 써서 내치를 안정시킨 다음에, 자신과 정히 대립하고 갈등하게 되면 그때 가서 차도살인하거나 숙청하고 쫓아내는 식이었는데 교활한 성격답게 특히 사람들 사이의 원한관계나 심리를 잘 이용했다. 가남풍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사람 중 일부는 [[조선]] [[문정왕후]]의 경우처럼 여성이 권력을 가졌다는 자체를 몹시 싫어한 유학자 사관들이 가남풍의 행적을 왜곡해 의도적으로 악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일각에서는 팔왕의 난의 전개를 보면 가남풍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엔 팔왕의 난 주동자인 황족들이 이미 너무 막장이었고,[* 가남풍이 죽었는데도 한참 동안 팔왕의 난 주동자들 지들끼리 싸운 데다 가남풍이 죽자마자 혜제를 폐제시키고 자신들이 황제를 참칭하는 등등이 있다.] 되려 가남풍같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세상을 꿰뚫어보는 사리에 밝은 능력 있는 사람이 중앙정부에서 황제를 비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 동안은 그나마 황족들이 가남풍을 두려워하여 감히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면서 옹호해 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혜제 사마충은 가남풍이 곁에 없고부터는 폐위당했다가 복위되었다가 하며 생명의 위협까지 겪게 된다. 가남풍의 일반적인 인식이 '나라를 망친 추녀'다 보니 흔히들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가남풍은 그야말로 [[혼돈 파괴 망가]]였던 당시 상황에서 '''10년 가까이 안정적인 시국을 유지'''했다. 물론 선제 당시의 체제를 이어받은 것 뿐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어찌 됐건 권력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 권위의 사용에 반발이 컸을 여인의 몸으로 뛰어난 인선을 통해 이 체제를 영리하게 운영해낸 건 탁월한 일. 비록 용모는 추녀였을지 몰라도 그 지성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듯. 그러나 후반에 본격적으로 막장이 되어 황족들 사이에 피바람이 일면서 실드 불가의 영역으로 가고 말았다. 가남풍이 정권을 잡은 몇 년간 천하는 다소 평온해졌던 바, 가남풍 이 사람이 권력욕이 세기는 했지만 [[장화(삼국지)|장화]]를 중용한 덕분이었다. 장화가 나라를 그나마 그럴듯하게 꾸려 갔다. 그래서 국경지대가 약간 시끄러웠던 정도만 제외하면 이 평온은 가남풍의 집권 내내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