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덕도 (문단 편집) == 역사 == 최소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그 증거로 패총(조개무덤)이 남아 있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가덕도 종합개발 사업 당시 서북쪽 장항지구의 약 3~6m 높이의 구릉지에서 약 6000년 내지 7000년전으로 추정되는 신석기인 유골 48구가 발굴되었다. 한 마디로 선사시대 공동묘지가 발굴된 것.[* 한반도 토양은 대부분 산성이기 때문에 역사시대 이전의 인골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기는 쉽지 않다. 조선시대처럼 석곽묘를 만들어 미이라를 만들지 않는 이상, 오랜 세월에 대부분 삭아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 연구진의 초기 조사결과, 이들의 유전자에서 현대 [[한국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유럽인]]의 유전자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H가 나와 놀라움을 주기도 했으나 이후 추가적인 사실 확인절차가 필요하다. 이들 유골 중 24기는 태아 자세로 묻은 형태(굴장), 8기는 이후 역사시대처럼 똑바로 하늘을 보고 누운 형태(신천장)로 발굴되어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 공동묘지에서는 인골 외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토기를 비롯하여 수백 점의 부장품도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주류설은 서로 다른 매장문화를 가진 두 집단이 이 지역에서 공존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가덕도동 성북마을 인근에는 [[7세기|7]]~[[8세기]]의 [[가야]]시대 고분이 확인된다. [[파일:attachment/가덕도/jin.jpg]] 또한 부산 앞바다에 위치하였기에 지리적으로는 외떨어졌을지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중요했다. 일단 [[임진왜란]] 당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에 의해 가덕도왜성이 [[축성]]되어 일대 감제 및 중간 거점으로 쓰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수군통제사 [[원균]]은 도제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로부터 적의 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아 부산포로 출정하였으나 이 때 숨어 있던 [[왜군]]에게 첫 번째 기습을 당했고 원균은 간신히 가덕도로 빠져 나갔으나 또다시 기습을 당해 거제 칠천도로 물러났다. [[칠천량 해전|그리로 거기서...]] [[파일:attachment/가덕도/mak.jpg]]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최초로 설치되었고 그 당시의 280mm 유탄포 6문을 배치한 포대 및 화약고와 [[사단(군사)|사단]] [[막사]]가 지금도 그대로 외양포 일대에 남아있다. 막사 건물은 민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일부 일본군 요새같은 경우 실제로 주민들이 살고 있는곳 바로 옆에 있는 경우가 많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만들어진 새바지항 인공동굴은 새바지항 주민이 살고 있는 곳 바로 옆에 있다. 역사 대대로 지금의 [[창원시]]의 전신인 [[웅천군]]-[[창원군(행정구역)|창원군]]-[[의창군]] 관할이었지만, [[1989년]] [[부산광역시]] [[강서구(부산광역시)|강서구]]에 편입되면서 이후 아래에서 설명할 여러가지 큰 공사와 [[떡밥]]들이 쌓여 본격적으로 가덕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2015년]] [[1월 4일]]에 천가동에서 [[가덕도동]]으로 동명을 변경했다.[[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5010500007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