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르궁린 (문단 편집) === 무주에 투항 === 당시 가르친링은 대내적으로 권세가 높았고, 대외적으로는 당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대비천 전투와 승풍령 전투에서 당군을 대패시켰고, 이후 692년 당항족과 강족이 당으로 투항해 오자 [[왕효걸]]이 안서사진을 탈환하였고, [[가르찬파]], [[가르다고리]]는 당군에 패하였으나, 696년 가르친링은 당군을 소라한산에서 대패시켰다. 이에 가르친링이 당 조정에 서돌궐 땅은 자신들이 가질 것과 안서사진 철군을 요청했으나 무측천은 가르 가문의 약화를 눈치채었고 이를 반대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가르친링의 대당 강경책이 토번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는 점이다.] 첸뽀였던 [[치둑송첸]]은 나이가 들수록 가르 가문의 득세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지자 가르 일가 숙청을 준비하게 되었다. 699년 치둑송쩬이 가르 일가와 톤미 일가를 숙청한 뒤, 가르친링은 이에 맞섰으나 패한 후 종극 지방(宗克, 지금의 칭하이성 황수 유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성력 2년(699년) 4월 숙부 찬파와 함께 이끄는 부락 천여 명, 토곡혼 부락의 칠천 장을 이끌고 무주에 투항했다. [[측천무후|무측천]]은 가르친링, 가르찬파, 가르궁린에게 논씨를 하사하였고, 가르궁린에게 좌옥검위장군, 주천군 개국공에 봉해 귀회군왕을 지냈고, 식읍 이천 호를 하사받은 이후 그는 부서를 이끌고 택로 지역에 주둔하였다.[* 가르찬파는 그 뒤 죽고 안서대도호를 추증받는다.] 이후 당번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토번군을 설득함으로써 당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등 토번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