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산산성 (문단 편집) == 상세 == [[병자호란]] 이후 [[인조]] 17년(1639)에 혹시나 또 있을지 모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목적으로 내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든 내성의 규모는 상당했는데, 성벽의 둘레가 약 4 km에 성문은 세 곳, 소문도 여덟 개가 있었다. 또한 산성 안에 우물이 수십 개, [[절(불교)|절]]도 부근의 [[송림사]]를 비롯하여 넷이나 있는 등 시설도 상당했다.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칠곡도호부의 관아도 가산산성 안에 설치되면서 여러 창고와 기지도 이와 함께 들어왔다.[* 하지만 관아가 산꼭대기에 있어서 접근성이 대단히 떨어졌기에 [[순조]] 19년(1819)에 칠곡도호부 관아를 산 아래로 옮기고, 가산산성에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만 별도로 두었다.] 이후 [[숙종(조선)|숙종]] 26년(1700)에 [[병자호란]] 방어 목적으로 왕명에 의해 외성을 추가로 축성했으며, [[영조]] 17년(1741)에는 중성이 만들어졌다. 특이하게도 4년 뒤 영조 21년(1745)에는 중성 안에 [[석빙고|빙고]]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3125&cid=42840&categoryId=42854|답사여행의 길잡이 8 팔공산 자락 - 가산산성]]] 입지가 훌륭하여 천혜의 요새이며 전략적 요충지인지라, 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전쟁]] 중 가산산성에서 국군과 인민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 국군이 패퇴하였다고 한다. 웅장한 외관과 규모 덕에 가산산성은 이 당시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성을 무리하게 건설하면서 주변 민심은 바닥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여러 행정 관청과 시설들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주둔해 있어서 미군과 한국군이 무진장 폭격을 하여 남아 있는 것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