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서한 (문단 편집) == 생애 == 본래 가서한의 집안은 안서에서 대대로 살았다. 아버지 도원은 안서도호장군 적수군사를 역임했는데, 아버지처럼 용맹하여 장수의 길을 걸었다. 집안이 부유해 딱히 가난에 시름하지는 않았다. 40세 때 그는 [[시안(도시)|장안]]으로 내려가 당시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휘하 무장으로 들어가 실력을 쌓았고, [[왕충사]]의 아장으로써 [[토번]]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해 대두군부사에 임명되었다. 747년, 왕충사가 석보성 공략을 반대한 것으로 인해 재상 [[이림보]]의 모함을 받아 하옥되자[* 왕충사는 처형당하기 직전이었으나, 가서한이 그를 살려줄 것을 간청하였다. 왕충사는 한동태수로 좌천되고, 이후 사망.] 그를 대신하여 가서한이 농우절도사에 계임하여[* [[안록산]]의 사촌이었던 [[안사순]]은 하서절도사로 임명되었는데, 안사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지속적인 토번의 침공에 대응하며 기습하기도 했다. 741년 토번이 청해호 부근에 홍산에 건설한 석보성[* 이전 신안왕 이의가 빼앗았으나, 이후 토번군에게 다시 빼앗김]이 당나라의 [[타림 분지]] 진출에 심각한 장애가 되자, 당나라는 대군을 보내 여러차례 석보성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가서한은 749년 6만 3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공성전 와중에 공격군은 절반이 전사하였으나 성을 수비하던 토번군 병력은 장수 한 명의 지휘를 받는 400여명에 불과하였다.[* 6만 3천명의 병력이 겨우 400명에 막혔다는 것은 아니다. 이 400명의 잔존 병력은 정확히는 토번군의 후퇴를 돕기 위해 남은 최후의 병력이었다. 상식적이게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서역, 돌궐, 당, 토번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인 석보성을 겨우 400명의 병력으로 지킬리가 없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충사가 옳았다고 했다.] 여하튼 가서한의 석보성 공략이 없었다면 고선지의 서역 원정과 탈라스 전투도 불가능했다. 753년에는 710년 토번에 넘겨주었던 하서구곡을 탈환하였고, 후에는 전횡을 일삼던 양국충의 눈에 들어와 안록산의 권력에 맞서는데 동조했다. 양국충은 주문을 올려 가서한을 하서절도사를 겸임시키고, 작위를 내려 서평군왕에 삼았다. 술과 여색을 즐기다가 풍질에 앓아 군영에서의 생활을 그만두고 장안에서 쉬는 도중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자 태자 이형의 병마부원수에 임명되었다. 낙양에서의 방어 작전에 실패한 [[봉상청]]이 [[고선지]]와 함께 방어선을 섬서에서 동관(潼關)으로 이전시키다가 변령성의 모함을 받아 참수되자 가서한이 전권을 위임받았다. 가서한은 난공불락인 요새인 동관에서 안록산의 군을 막고자 하였고 [[양국충]]이 이를 경계해 [[안사순]]으로 하여금 가서한을 모함하게 하나 이를 눈치챈 가서한은 안사순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안사순은 처형당하였다.[* 가서한은 안사순이 안녹산과 내통한다고 무고했고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당 현종에게 말한 뒤 안사순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고 안사순은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처형당한다. 그 일족은 영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안사지란 평정 뒤 [[곽자의]]의 주청으로 누명을 벗는다.] 그 뒤 안경서의 군대를 격퇴했으나, 간신 양국충이 [[당현종]]에게 독촉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라고 명령했다. 가서한은 어쩔 수 없이 18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갔으나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좁은 길목에 대군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고 이를 안록산의 부장 최건우가 놓치지 않고 공격하면서 대패하였다. 다시 동관으로 도망쳐 동관을 지키려 했으나, 그 부장 화발귀인이 그를 적군에게 팔아넘겼고,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화발귀인은 나중에 안록산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안록산의 명령을 받고 다른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고 낙양에 유폐되었다. 757년, 당군이 낙양을 수복하자 [[안경서]](安慶緖)가 업으로 후퇴하면서 포로로 잡아놓았던 당의 장수 30여 명을 살해했는데 가서한 자신도 그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정천리]]도 이 과정에서 가서한과 함께 살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