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야멸망전 (문단 편집) == 정세와 《일본서기》 == 562년 [[대가야]] 정벌전에서는 백제와 왜도 대가야를 지원하기 위해 즉시 지원군을 파병했다는 것이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왜군이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왜곡]]이 많이 섞여있어 전체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562년 가야 멸망을 막으려 지원군을 보낸 부분은 ''''신라군이 왜군에게 크게 이겼다''''는 내용을 의외로 왜곡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하고 있어서 한국 측 사서 내용과 별로 [[모순]]이 존재하지 않으며, 큰 틀에서 같은 사건을 더 세세하게 전하고 있어 참고가 되고 있다. '신라군 vs. 가야군+백제군+왜군' 구도는 10여년 전 [[관산성 전투]]의 구도가 재현된 것이었지만 백제군의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있었다. 사실 백제는 [[위덕왕]]이 패전 책임을 지며, [[출가]] 쇼를 벌이고 대신들로부터 관산성 패전의 책임을 질책받을 정도로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만 출가쇼 기록은 《일본서기》 한정이다. 2000년대 이후 발굴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 위덕왕이 555년에는 즉위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555년 ~ 557년 사이의 공위 기간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쓸만한 동맹인 가야를 살려두기 위해서 상당히 무리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왜는 대장군(大將軍) 키노 오미 오마로노 스쿠네(紀臣 男麻呂宿禰), 부장군(副將軍) 카와베노 오미 니에(河邊臣 瓊缶)가 병력을 이끌고 가야를 지원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왜군 장군이 백제 군영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므로, 왜군과 백제군이 합류해서 신라군과 싸운 듯하다. 왜군 수뇌부는 가야인을 아내로 맞은 장수 코모츠메베노 오비토 토미(薦集部首 登弭)에게 명령해 백제군 진영에 군사계책을 가지고 가게 했는데, 이 자가 처가집에 들리는 바람에 군사기밀을 봉인한 서신과 화살을 길바닥에 실수로 떨어뜨리는 사고를 쳤고, 그걸 신라군이 손에 넣어 전략이 들통나 신라가 군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비슷한 일화로 [[미국]] [[남북전쟁]] 때 [[앤티텀 전투]]에서도 남군의 장교가 군사기밀을 길에다 떨어뜨린 것을 북군이 주운 덕분에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침공]]에서도 황색 작전 계획서를 휴대하고 있었던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가 타고가던 비행기가 [[벨기에]] 상공에서 추락해 계획서가 탈취되는 바람에 급히 [[낫질 작전|작전]]을 변경해야 했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타고가던 비행기가 [[다바오]] 상공에서 추락, 동석했던 참모장이 휴대하고 있던 Z작전 계획서를 압수당한 전적이 있다.] 대가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일단 왜군은 신라군을 상대로 한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특히 부장군 니에의 무용이 뛰어나 신라군을 많이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차례 승리한 후 대장군인 오마로노 스쿠네가 동맹인 백제군 군영에 들어가서 일장연설을 했는데, 써있는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승리한 장군이 하는 대사라기엔 살짝 부자연스럽다. 《일본서기》 특유의 허술한 윤색일 뿐 실제로는 패배했거나, 간신히 신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백제군과 합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를 보면 초반에 소규모 전투는 몇 차례 승리했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 그러자 신라군은 왜군에게 거짓 항복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 측 기록에서도 등장했던 [[백기]]가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가야군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 사용했던 [[백기]]를 여기서 다시 들고 무기를 버리며 왜군에 항복하는 척을 하자 부장군 니에는 군사병법에 밝지 못해 그것이 진짜 항복하려고 하는 것으로 속아넘어가 방심하고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도 응답의 의미로 백기를 들고 신라군에 접근, 이에 신라군이 크게 역습해 백제군 + 왜군 1,000여 명을 죽였다. 이 패배로 지휘관급 인물 중에는 야마토노 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彥)만이 빠른 말을 타고 있어서 간신히 달아났고[* 신라 장수에게 맹렬하게 쫒기다가 성의 [[해자]]를 말 탄 채로 뛰어넘자 신라 장수가 쫒아오지 못하고 "쿠스니지리(久須尼自利, 구수니자리)!"라고 외치며 탄식했다고 한다. '쿠스니지리'가 무슨 뜻인지는 일본 측 기록에도 알 수 없다고 적었다. 당시 한국어 표현으로 추정되지만 이것도 일본인이 들리는 대로 쓴 것이라 [[몬더그린]]일 수도 있어서, 실제 발음이 그대로 전해졌는지도 의문이다.] 나머지 왜군 장수는 모두 잡히거나 전사했다. 부장군 니에와 그 부하들의 가족을 잡은 신라 장군[* 한국 측 기록까지 감안하면 이 신라 장군은 당시 신라군을 지휘했던 [[이사부]]나 [[사다함]]일 수도 있겠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은 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보고 니에에게 "네 목숨이 소중하냐? 아내가 소중하냐?"고 이야기했고, 니에는 당연히 목숨이 소중하다며 아내와 여자들을 바쳤다. 그러자 신라 장군은 니에는 풀어주고 옥외에서 우마시히메를 능욕했다. 우마시히메는 나중에 풀려나서 니에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니에가 그녀와 말을 나누려 하자 "날 팔아치우고 살아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말을 거냐"며 일갈했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또 이 신라 장군은 포로가 된 장군인 츠키노 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에게 칼을 대고 하카마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왜국의 장군은 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외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이키나는 끝까지 "신라의 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반대로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화가 난 신라군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도 같이 죽었는데 아버지의 유해를 안은 채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왜국 장군'의 대응어가 '신라 왕'인 것으로 보아서 원래는 [[천황]]을 조롱한 것이었으나 《일본서기》 저자가 감히 천황 조롱하는 표현을 책에 바로 써넣을 수가 없어 장군이라고 말을 돌려서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 엉덩이라는 표현도 원문에서 '먹을 담(㗖)' 한자를 쓴 걸 보아선 실제로는 [[똥]]을 엉덩이로 순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서기》 자체가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일본에 좋은 쪽으로 과장한 서술이 많은 와중에 유독 여기서는 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런 내용들이 기재된 이유는, 아마도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왜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기록을 그대로 남긴 게 아닐까 싶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