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야토기 (문단 편집) ==== 창녕양식 토기 ==== [[창녕]] [[교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비지국]], [[비지국|비자벌]] 또는 [[가야 #s-5.2|비화가야]]의 토기문화는 말그대로 가야토기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신라토기]]에 속하기도 한다. 물론 단순히 실존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가야 #s-5.2|비화가야]]라는 명칭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고 토기 양식군의 특징이나 교동 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의해서 신라 또는 가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이서와 이동의 중간이다. || [[파일:유리건판 창녕2.jpg|width=320px&align=center]] || [[파일:CN_GD_2.jpg|width=120px&align=center]] || || 교동 89호분 || 계성 2호분 || 사실 외견상으로는 거의 [[신라토기]]에 가깝다. 위의 사진[* 참고로 흑백사진은 유리건판이라고 하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에서 보이는 고배(굽다리 접시)처럼 고배의 비율이나 특히 고배의 위에 있는 뚜껑의 '대각도치형'[* 뚜껑만보면 마치 고배가 뒤집어진 듯한 느낌이다. 대각은 고배의 다리를 말하는 것으로 대각이 뒤집어진 듯한 형태라고 하여 대각(臺脚) 도치(倒置)형이라고 칭한다.]손잡이 모양, 그리고 뚜껑의 [[유충|유충문]][* 그 애벌레 맞다. 애벌레 모양으로 장식해서 유충문이라고 한다.] 장식이 저런 느낌된 것이 주로 창녕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특유의 살짝 갈색빛을 내는 소성분위기가 있다. 또 [[가야]]나 [[신라]] 권역 내에서도 조금씩 확인되어 교류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야토기의 범주에도 들어가는 이유는 토기의 양식적인 문제는 아니고 개념적 용어 때문에 그렇다. 역사고고학 중에서도 [[삼국시대]]를 중심으로하는 연구에서는 보통 문헌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고고학적으로 다소 구분이 되는 집단에 대해서 소국(小國), 내지는 정치체(政治體)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가야고고학에 있어서도 그러한 소국이나 정치체, 집단이 있기 때문에 가야고고학의 장르에서 다뤄지는 소국이라는 의미에서 가야 토기와 관련된 테마의 책이나 주제 속에서 창녕 토기가 다뤄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는 [[비지국]], [[가야 #s-5.2|비화가야]], [[비지국|비자벌]] 등의 이름 아래의 독자성을 강하게 띄는 집단이라는 견해를 내세우는 쪽에서 주로 거론되는 것이다. 반대로 [[신라]]의 여러 지방 정치체들 가운데 하나 또는 독자적 세력이었으나 신라에 포섭된 집단 정도로 보는 경우에는 사실상 [[신라토기]]의 범주 아래에서 논의된다. 참고로 낙동강을 끼고있는 중·하류 서쪽의 가야권 소국들 가운데서도 이런 친신라적 가야가 몇몇 있다. 바로 [[다라국]]으로 추정되는 [[합천군]] [[합천군/행정 #s-3.3|쌍책면]]에 소재하는 [[옥전 고분군]]이다. 정치체를 상정할만큼의 성장을 이룬 시점에는 대가야의 영향력이 훨씬 더 두드러지지만 5세기말, 6세기 초반부터는 [[신라]]의 토기나 유물, 심지어는 금동관도 출토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