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야토기 (문단 편집) === 소가야 양식 토기 === [[고자국|소가야]] 양식 토기를 구성하는 기종은 위의 여타 가야 고분군과 비슷하다. 하지만 고배가 아에 종류 자체가 약 3종으로 구분된다. 무개식 삼각투창 고배[* 뚜껑이 없는 삼각형 투창 장식이된 굽다리 접시], 유개식 삼각투창고배[* 뚜껑이 있는 삼각형 투창 장식이 된 굽다리 접시, ~~이쯤되면 한자어를 쓰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단교호투창고배[* 다리가 2단으로 구분되어 교차되어 투창이 뚫린 굽다리 접시]로 크게 구분된다. 각 종류마다도 어느 정도 시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소가야 양식토기에서의 이단투창고배와 [[신라토기]]에서 말하는 이단투창고배와는 형태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엄연히 다른 토기이다. 아래의 사진들이 바로 소가야 양식 고배와 장경호로 둘다 구연부라던지 뚜껑받이 턱의 형태가 전반적으로 넓은 것이 특징이다. [[파일:소소소.jpg|align=center&width=500]] 무개식 삼각투창 고배와 유개식 삼각투창 고배는 사실상 뚜껑받이 턱의 유무에 따라 나뉠 뿐, 그 부분만 제외하면 전반적인 크기나 대각(접시 받침 다리)이나 대각단의 형태, 비율 등의 변화의 경과는 유사하다. 뚜껑받이 턱이 없는 무개식의 경우 약간의 굴절이 있는 배신의 형태를 띄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삼각투창고배가 형성되는 와중에 5세기 중엽을 즈음하여 이단교호투창고배가 나타난다. 신라토기와 구분되는 특징이라면 뚜껑받이턱과 구연부의 간격이 신라토기에 비해 넓다는 특징이 있다. 6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는 소가야식의 이단투창고배가 기존의 삼각투창고배를 대체하다가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신라토기]]로 점차 대체되면서 소가야 양식이 소멸한다. [[파일:소소소_2.jpg|align=center&width=500]] 소가야 양식은 고배 이외에도 '''수평구연'''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__수평구연장경호__, __수평구연발형기대__가 있다. 수평구연장경호의 경우 구연부와 동체부의 비율이 1:1이었다가 점차 동체부가 작아지면서 거의 [[나팔]]처럼 벌어진 구연부만이 강조된 느낌으로 변화한다. 수평구연발형기대의 변화 또한 비슷한데 구연부의 구연부의 수평적인 진행이 더 강해지지만 대각부분은 점차 날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고배류와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이 되면서 종언을 맞이한다. 다만 소가야 양식토기 같은 경우엔 약간의 쟁점이 있다. 다른 여타의 큰 범주의 토기양식들은 중심지가 선명한 편이지만 소가야 양식은 일단은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의 [[송학동 고분군]]이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송학동 고분군에서는 하도 외래계가 많아서 소가야 양식의 출토량이 되려 그리 많지 않다. 고성 내산리 고분군[* 내산리 고분군도 대규모의 고분군이지만 개별 고분의 위계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따라서 실질적 중심지를 상정하는 근거가되고는 있지만 양식의 진짜 중심지라고까진 보지 않는다. 대신 대외, 해외교류 활동이 활발했던 소가야의 양상을 대표하는 고분군이다.]을 제외하면 중점적 소비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 물론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 인근한 기월리가 조사되고 있는데, 이 결과에 따라서 꾸준한 소비지, 고분군의 위계까지 갖춘 완연한 양식의 중심지로 볼 근거가 될 수 있다.] 분포 범위는 [[진주시|진주]], [[고성군(경상남도)|고성]], [[사천시|사천]], [[산청군|산청]] 남부, [[합천]] 삼가면 일대, [[통영]], [[거제]], [[마산]], [[창원]], [[의령]] 등지에 걸쳐 넓게 분포[* [[진주시|진주]] 무촌, 가좌동 고분군, [[산청군|산청]] 묵곡리, 중촌리, 평촌리, 옥산리, 명동 고분군, [[합천]] 저포리 고분군, [[의령]] 예둔리 고분군에 [[고성군(경상남도)|고성]] 내산리와 송학동, [[남원시|남원]] 월산리, [[사천시|사천]] 선진리, [[마산]] 현동, 합성동 고분군, 거제 구영리, 장목 고분 등등~]하고 있다. 이처럼 매우 넓게 분포하고 있지만 [[고성군(경상남도)|고성]]이나 [[진주시|진주]] 정도의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른 집단들에 의해서 점유 관계가 변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소가야 양식 분포권의 북쪽과 동쪽은 대가야의 영역에 접해있어서 대가야 양식 토기들과의 혼용[* 산청 쪽에서는 특히 대가야 뚜껑을 쓰는 유개배(有蓋盃, 다리없는 그릇), 대가야 장경호, 띠 모양의 짧은 대가야 기대의 조합에 소가야계 장경호나 고배, 발형기대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이 특징적이다. 반면 서쪽의 창원이나 의령, 마산 등지에서는 혼용도 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소가야 토기가 많아지기도 하고 대체되기도 한다.[* 보통 아라가야 양식과 일부 병존하다가 소가야 양식이 우위를 점하다가 신라 토기가 조금씩 유입되면서 대체되는 양상이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다 다르지만 전반적인 경향이 그렇다. 의령 예둔리 빼고.]그렇기 때문에 소가야 양식 토기가 출토된 고분군을 만들었던 각 집단들의 관계망이 느슨하다라는 해석이 전제되기도 한다. 일단은 다소 모호하지만 어쨌거나 중심지로 볼 만한 대형의 고분군은 송학동 고분군 뿐이며, 이는 소가야, 즉 [[고자국]]과 관련되어 생각될 수 밖에 없다. 해당 문서에서 고고학적인 향방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있으니 참고 바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