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세리크 (문단 편집) === [[로마 약탈]] === [[파일:attachment/saccodiroma.jpg|width=600]] [* 19세기경 러시아의 화가인 카를 브률로프(Karl Briullov)의 그림이다. 좌측의 검은 말을 타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가이세리크이다. 중앙에는 로마의 황후와 황녀들, 우측에는 로마 교황인 레오 1세가 그려져있다.] 455년 3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명장 [[아이티우스]]를 숙청했다가 그 보복으로 아이티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처참하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암살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뒤를 이어 서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이 사건은 서로마 내부에 극심한 혼란을 부추겼다. 가이세리크는 이 기회를 노려 ~~야만족의 로망~~ [[로마 약탈]]을 계획했다.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전에 평화조약의 조건이었던 후네리크와 발렌티니아누스의 딸의 약혼이 무산되었으니, 평화조약 또한 무산되었다고 주장하며 그해 6월 2일, 함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로마]]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하고는 2주에 걸쳐 약탈을 자행했다. 이로써 가이세리크는 [[서고트 왕국]]의 [[알라리크 1세]]에 이어 제정시기 로마를 약탈한 두 번째 야만족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 [[레오 1세(교황)|레오 1세]][* 참고로 동시대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 트라키안|레오 1세]]도 공존했다.]는 가이세리크와 협상을 시도했고, 그 결과 가이세리크는 저항하지 않는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숨긴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건물에 방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2주 동안 로마를 약탈한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인 에우도키아 · [[플라키디아(올리브리우스의 아내)|플라키디아]] 등을 사로잡아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당초의 약속에 따라 후네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딸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에 가이세리크는 결혼을 핑계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참금]]을 뜯어내어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에우도키아의 여동생 플라키디아는 후에 다시 서로마로 귀환했다.] 이때 반달족은 [[발레아레스 제도]], [[사르데냐]], [[코르시카]], [[몰타]]를 공격했고, 곧 서부 지중해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