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정제 (문단 편집) === 가정난치 === ||[[파일:external/static.jstv.com/201510291446060232412_8.jpg|width=300]] || 이후 황제는 환관의 주선으로 할아버지 [[성화제]]처럼 [[도교]]를 신봉하여 스스로를 신선이라 칭하고 긴 도호를 붙이는가 하면, [[월경]]혈과 아침 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다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또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슬리게 하면 사정없이 매를 쳤다.[* 중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로 인해 죽은 궁녀가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 가운데 즉위 후 가장 빨리 여색에 빠졌는데(3년), 이것도 [[도교]]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가정제가 총애하고 아꼈던 도사들은 정말로 순수하게 그를 따랐으면 따랐지 이런 상황에서 흔하게 보이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계사는 가볼것도 없이 당장 중국사만 봐도 [[십상시]]나 [[왕현충]]같이 황제의 총애를 받던 이들이 나라를 쥐고 흔들다가 말아먹은 사례는 차고 넘친다.] 그가 얼마나 [[궁녀]]들을 혹사했는지, 가정 21년(1542) 황제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궁녀]] 16명이 애첩과 동침하던 황제를 목졸라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 사태를 임인궁변(壬寅宮變)이라 한다. 궁녀들의 계획이 성공하여 가정제가 죽었다면 역사상 최악의 죽음을 당한 황제가 되었겠지만[* 이렇게 죽은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동진]]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효무제(동진)|효무제]]는 애첩한테 "네 나이도 이제 30살이구나. 더 젊은 여자를 찾아야겠다."라고 말했다가 [[질투|질식사]] 당했다.], 궁녀들이 긴장을 타서 매듭을 잘못 지은 바람에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비녀로 찔러댔지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와중에 황제가 계속 죽지 않자 궁녀 중 한 명인 장금련(張金蓮)이 두려워서 [[황후]]한테 사태를 보고하였고, 황후가 사람을 이끌고 와서 황제를 구해주었다. 물론 장금련을 포함해 가정제 암살을 시도한 [[궁녀]] 16명은 전원이 저자거리에 끌려가 [[능지형]]을 당했다. 나머지 15명의 궁녀들의 이름은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양옥향(楊玉香), 소천약(蘇川藥), 요숙고(姚淑皐), 왕괴향(王槐香), 관매수(關梅秀), 유묘련(劉妙蓮), 진국화(陳國花), 왕수란(王秀蘭), 서추화(徐秋花), 정금향(鄭金香), 황옥련(黃玉蓮), 양취영(楊翠英), 장춘경(張春景)이다.[* 한편 [[중종(조선)|조선 중종]]은 이 일을 전해듣고 놀라, "어찌 궁녀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겠는가? 필시 주모자가 있을 것이다" 라면서 추측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https://sillok.history.go.kr/id/kka_13711017_001|#]]] 그런데 황후가 뒷처리를 하면서 아무 관련 없는 가정제의 애첩까지 죽여버린 것이 드러나자, 가정제는 황후한테 크게 화를 내었다. 물론 이 정도는 정상적이지만, 훗날 황후궁에 불이 나자 끄지 말라고 해서 그 황후가 불타 죽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야사에서 나오는 추측일 뿐이다. 황후 방씨는 가정제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그의 무덤에 같이 묻힌 사람이다. 가정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있던 황후부터 [[융경제]]의 생모가 된 두 황후까지 황후가 모두 4명이 있었는데, 오직 방 황후만 가정제와 같이 묻힐 수 있었다. 현재 가정제의 무덤에는 황후 3명이 묻혔는데, 나머지 둘은 가정제가 죽은 다음 [[융경제]]가 생모를 부황의 곁에 합장시키는 와중에 같이 합장한 것이다. 합장이 안 된 나머지 한 명은 폐후였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죽인 다음 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무덤에 묻을 리가 없다. 사람을 죽인 다음 슬픈 척하면서 이런저런 제사를 거하게 올릴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저승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곤녕궁의 화재로 방 황후가 목숨을 잃은 다음 사람들의 상상에서 비롯한 추측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정제는 점점 [[도교]]에 심취했다. 도교의 제문(祭文)을 청사(靑詞)라 부르는데, 급기야 청사를 잘 만드는 자가 재상으로 발탁되었단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청사를 잘 지어 출세하고 정권을 장악했다고 유명한 인물이 [[엄숭]]이다. 그는 도교를 광신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는 가정제를 대신해 국정을 전횡하기를, 전후 20년에 달했다. 그 동안 극도의 뇌물 수수 행위가 정치 전반에 만연했다. 환관 세력이 일시 후퇴했으나 그 대신 권신의 독직 정치가 왕조의 퇴락을 촉진시킨 것이다. 게다가 엄숭이 휘두른 권력의 배경은 환관 세력과의 적절한 타협에 있었다. 즉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후퇴였다는 것.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 도교를 믿은 황제는 원래 많았다. 예를 들어 명군으로 손꼽히는 [[홍치제]]도 도교를 믿었다. 엄숭은 도교의 제문을 잘 짓기로 유명했으며,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쫓겨난 다음 도교의 제문으로 황제의 신뢰를 회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청사재상이라고 비난했다. 엄숭이 간신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대학사였고 재상에까지 오른 인물이었으며 쥐뿔도 없는 인물이 청사 하나 잘 짓는다고 재상까지 오른 것이 결코 아니다.[* 기실 명나라의 재상이라고 말하는 내각 대학사는 원래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하던 정5품정도의 관직이였으나, 홍무제 시기 승상직이 폐지되면서 중요해졌고, 가정제 시기 예우(禮遇)를 1품관인 육부상서(六部尙書)의 상위에 두면서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