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정제 (문단 편집) === [[북로남왜]] === [[파일:9c02da9330371f50f1f3a935bb09ab7d.jpeg.jpg|width=300]] 가정제가 통치한 16세기 중엽은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오이라트]]와 [[왜구]]의 침공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였다. 북쪽으로는 [[토목의 변]] 굴욕을 겪은 지 101년 후인 1550년에 [[몽골]]의 [[알탄 칸]]이 [[베이징]]을 포위한 [[경술의 변]]이 일어났다. 남쪽으로는 [[왜구]]가 극성을 부려 혼란을 겪었다. 특히 가정제 시기의 [[왜구]]는 노략질이 워낙 심해서 당시의 왜구를 "가정 왜구"라 부르기도 했으며, 해상 밀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중국인]] [[왕직]]이 왜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중국 남해안을 들쑤시고 다녔던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때 [[명나라군]]이 얼마나 막장이였냐면 왜구가 가장 활개를 치던 1555년 명나라는 '''고작 72명'''의 왜구들을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90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참고로 동시기 [[조선]]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2차 [[을묘왜변]] 당시 '''70명으로 14배가 넘는 1,000명의 왜구들을 무찌른 엄청난 대첩을 거두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나 [[척계광]]의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 적은 없었다.[[https://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60120|#]] 다만 이 때 [[척계광]]이 1544년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기용이 늦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때 그는 겨우 16살이었고, 척계광이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급으로 기용된 것이 1555년, 27살 때이니 이 때도 전혀 늦게 임명한 것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