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 (문단 편집) === 개신교와의 차이 === [[개신교]]와 가톨릭은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큰 사건을 겪고 갈라진데다 교리적인 차이도 상당히 큰 편이어서, 일부 신자들은 [[이단]]으로 여기며 승인하지 않는다. 가톨릭에서 개신교를 '신교'라는 표현보다 '열교(갈라진 공동체)'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개신교에 대한 적대감정을 많이 누그러뜨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에둘러 표현할 뿐이며, 성사적인 공통점이 많이 남아있는 [[성공회]]마저도 사도전승을 공유하는 교회로 보지 않으니 [[루터교]], [[장로교]] 등 다른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이 어떠한지는 말해 무엇하랴. 그런 가톨릭일지라도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이적하는 신자의 경우 제한적이나마 개신교에서 받은 세례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해주기도 한다. 소속했던 교파의 교리에 따라서 다른데, 이를테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교파에서의 세례는 무효하다고 판단하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이 증명되면 유효하다고 판단해주는 식이다. 기본적으로 개신교와 [[그리스도교]]라는 공통된 틀안에 있어서 기초적인 사상은 같거나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해석이나 신학적 입장은 개신교 종파에 따라 차이가 커진다. 가장 가톨릭과 비슷한 교리와 전례를 가진 개신교 종파는 [[성공회]]이며, 그 반대는 [[재림교회]]이다. 개신교는 유형적인 일치에 중요성보다는 성경만을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통일된 신학은 없다. 과장 좀 섞어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통점은 삼위일체와 예수를 통한 구원론 정도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때를 거슬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종22년 (1887년) [[호러스 뉴턴 알렌]]은 [[고종황제]]에게 가톨릭의 접근을 경계하라고 진언하면서 .(중략). 저들의 우상 숭배, 특히 마리아 숭배, 인간 사제의 죄 속량권, 남자로서 환관이 아닌 신부에게 부녀자들이 가서 죄를 고백하는 것은 몰염치한 짓이라는 상소를 한 일이 있으며...(중략)" 와 같은 내용이 있다. [[호러스 뉴턴 알렌]]은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이자 미국 공사인데, 19세기 말의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은 "가톨릭=[[성모 마리아]] 숭배교" 라는 잘못된 주장이 비단 [[한국의 개신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반가톨릭|보수 개신교가 본질적으로 지녀왔던 좀 더 오래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론적인 차이이다. 가톨릭은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2 (''populus Dei'')}}}이자 '그리스도의 신비체'{{{-2 (''corpus Christi mysticum'', 그리스도의 뮈스테리온적 몸)}}}로서 계시에 대한 정당한 해석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본다. 개신교와의 이러한 교회론적 차이는 성경, 성사, 각종 전통 해석에서 방법론적 차이로 이어진다. 가령 성경에 대한 관점 차이를 보자. 일부에서는 "개신교는 성경을 중시하고 가톨릭은 전통을 중시한다"고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가톨릭에서도 계시에 대한 최고 권위는 당연히 성경이다. 단지 최고 권위인 바로 그 성경에 대한 '해석'이 교단마다 다른 것이다. 여기서 가톨릭은 '가톨릭 교회의 해석'이 단지 인간적이거나 학술적인 수준을 넘어, '그리스도의 신비체'{{{-2 (그리스도의 뮈스테리온적 몸)}}}[* 뮈스테리온{{{-2 ''mystērion''}}}은 불가해{{{-2 (不可解)}}}한 것, 혹은 바로 그 불가해한 것을 가리키는 '가시적 표지'{{{-2 (=성사)}}}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뮈스테리온적 몸'이란, '가시적 표지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사가 되는 몸'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는 단지 법적이거나 인간적인 '법인'이 아니라 '성사적 단체'이며,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정당하게 대리한다.]로서 성경에 대한 정당한 관점을 정말로 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물론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발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상의 교회가 하는 성경 해석이 그 시대의 맥락과 불가분이라는 건 가톨릭 교회 스스로도 인정을 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성경 해석을, 각각의 시대에서, 그 시대의 가톨릭 교회가 정당하게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성전과 성경해석의 차이도 크다.''' {{{#!folding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접기・펼치기] >'''I. 사도전승''' > >75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모든 계시를 자신 안에서 이루신 주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되고 당신께서 성취하시고 친히 전파하신 복음을 모든 진리와 윤리 규범의 원천으로 모든 이에게 선포하도록 사도들에게 명하셨다.” > >'''사도들의 복음 선포''' > >76 복음은 주님의 명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전해졌다. > >- 구두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동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조언에 힘입어 배운 것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다.” >- 문서로는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이 성령의 감도로 구원의 소식을 기록하였다.” > >'''사도적 계승으로 지속되는 복음 선포''' > >77 “사도들은 교회 안에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자기 교도직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러므로 “영감 받은 책들 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사도적 설교는 세상 종말까지 지속적인 계승으로 보전되어야 했다.” > >78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생생한 전달은 성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성경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성전’(聖傳)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을 통해서, “교회는 그 교리와 생활과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것과 자신이 믿는 모든 것을 영속시키며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이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 들어온다고 가르친다.” > >79 이처럼 성부께서 성령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전해 주시는 통교는 교회 안에 현존하며 작용하고 있다. “예전에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신부(교회)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며, 성령께서는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도록 하시고, 신자들을 온전한 진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풍부히 머물도록 하신다.” > >'''II. 성전과 성경의 관계''' > >'''하나의 공통적 원천''' > >80 “성전과 성경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또 상통한다. 이 둘은 동일한 신적 원천에서 솟아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를 이루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마태 28,20)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교회 안에 현존하게 하고, 그 열매를 풍부히 맺게 한다. > >'''두 가지의 다른 전달 양식''' > >81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곧 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말씀은 성전으로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데, 후계자들은 진리의 성령에게서 빛을 받아 자신의 설교로 그 말씀을 충실히 보존하고 해설하며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82 그러므로 계시의 전달과 해석을 위임받은 교회는 “오로지 성경으로만 모든 계시 진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이 둘을 똑같이 경건한 애정과 존경으로써 받아들이고 공경해야 한다.” > >'''사도전승과 교회 전승들''' > >83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전’(聖傳)은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배운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제1세대에게는 아직 기록된 신약 성경이 없었으며, 신약 성경 자체가 살아 있는 ‘성전’의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 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적, 생활 규범적, 전례적 또는 신심에 관한 ‘전승들’은 사도전승과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전승들은 독특한 양식들을 이루게 되는데, ‘성전’은 다양한 장소와 시대에 따라 적용된 여러 표현들을 이러한 양식 안에 수용한다. 이 전승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성전’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되거나 또는 폐기될 수 있다. > >'''III. 신앙의 유산에 대한 해석''' > >'''전체 교회에 맡겨진 신앙의 유산''' > >84 성전과 성경에 담긴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체 교회에 맡겨졌다. “거룩한 하느님 백성 전체는 이 유산에 충실하면서, 목자들과 일치하여 꾸준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맺으며,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항구히 전념한다. 그리하여 전해진 신앙을 고수하고, 실행하며 고백하면서 주교들과 신자들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 >'''교회의 교도권''' > >85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 곧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 >86 “그렇지만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봉사한다. 이 권한은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고 충실히 해석한다. 그리고 교도권은 하느님에게서 계시되어 믿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모든 것을 이 유일한 신앙의 유산에서 얻어 낸다.” > >87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루카 10,16) 하고 말씀하셨다. 신자들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그들의 목자들이 여러 형태로 주는 가르침과 지도를 온순하게 받아들인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75-87항}}} 가톨릭에서는 성경을 해석하거나 이를 대하는 관점에 있어서 사도로부터 내려온 전승인 ''''[[거룩한 전통|성전(聖傳)]]'을 중시'''하고 있다. 성경과 성전은 교회를 떠받치는 동등한 뿌리인 셈.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는 기록된 성경과 달리,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형태로 교회의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과 실천적 관행을 [[거룩한 전통|성전]]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개인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쳐 성경 구절의 임의 해석을 허용하고 성전의 권위를 부인하는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은 성경이 교회의 성전이라는 맥락에서 발생했고, 바로 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이 소위 [[카더라]]를 중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성전'은, 성경을 발생시켰고 성경을 해석해온 고대 교회의 맥락 중, 교회가 오랫동안 신앙으로 받아들여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문헌 증거 등이 요구된다. 가령 고대 교회의 어느 문헌에 언급이 되었다 하더라도, 교회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냥 '문헌'이지 '성전'까지는 아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오는 성전 뿐만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겨난 각종 생활규범이나 예법 등에도 '전승'이라는 말을 써서 종종 오해를 부르지만, 이러한 자잘한 '전승'들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전’(聖傳)은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배운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제1세대에게는 아직 기록된 신약 성경이 없었으며, 신약 성경 자체가 살아 있는 ‘성전’의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br]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 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적, 생활 규범적, 전례적 또는 신심에 관한 ‘전승들’은 사도전승과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전승들은 독특한 양식들을 이루게 되는데, ‘성전’은 다양한 장소와 시대에 따라 적용된 여러 표현들을 이러한 양식 안에 수용한다. '''이 전승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성전’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되거나 또는 폐기될 수 있다.'''"[br][br][[가톨릭 교리서]] 제83항] 또한 가톨릭의 계시론은, 성경에 대한 명제들을 고대 수준에서 박제하여,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자는 의미도 아니다. 계시에 대한 교회의 이해가 시대적 맥락에 불가분으로 결합된 건 당연히 가톨릭 교회도 인정하며, 따라서 당연히 가톨릭 교회의 성경 이해는 '발전'이 가능하다. 오랫동안 가톨릭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온 성전들이, '명제를 고정시켜 박제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각의 시대에 정당한 해석들을 제공하는 일종의 '엔진'이 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성전 이해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당연하고 정당하게 현대의 비평적 성서주석학을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한 학술적인 분석에서는 사실 '가톨릭 성서학'이 '비그리스도교 성서학'이나 '개신교 성서학'과 거의 견해 차이가 없다. 단지 현대 성서학의 견해 중 특정한 견해를, 개별 가톨릭 성서학자 차원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차원에서 책임질 수 있다는 게 가톨릭 성서학의 독특함이다. 가령 2022년에 원서가 발간된 권위있는 가톨릭 주해서인 《21세기 제롬 성경 주해》{{{-2 ''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머리말에서는, 오늘날 성서학에서 교단간의 차이가 얼마나 미미한지, 그러면서도 왜 지금도 '가톨릭 성서학'이 필요한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 성서학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교회일치적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개신교. 정교회, 가톨릭의 간행물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교, 그리고 신학대학에서 성경 교과의 참고 문헌으로 높이 평가된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서학회{{{-2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와 '신약성경학회{{{-2 (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처럼 교파적으로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학회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미국가톨릭성서협회{{{-2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라고 고백하는 기관에서도 회원 자격을 공유하고 있다. 개신교와 정교회 학자들은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 함께 협회에서 공식적인 직위를 맡고, 편집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공식 기관지인 〈계간 가톨릭 성경{{{-2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에 기사를 기고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구약성경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다교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글을 쓰는 유다인 학자들뿐 아니라, 신약성경 해석 자체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유다인 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톨릭 성서학의 한 산물로서 이러한 주해 자료를 제공하는 데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전 두 판에서 우려했던 바는,[* (발췌자 주석) 본 주해서의 이전판인 1968년판과 1990년판을 말함.] 이 선택이 혹여 개신교나 유다교의 성서학에 대한 거부나 의심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가톨릭 안팎의 동료들에게 성경 해석에 대한 가톨릭의 접근법을 특징짓는 고유한 관점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특성 중 상당 부분이 특히 주류 개신교나 정교회와 공유된다 해도, 가톨릭의 성경 해석은 궁극적으로 가톨릭 신앙 공동체에 책임이 있으며, 가톨릭 전례, 영성, 그리고 교회론의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 《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창세기》, 주원준 번역, 성서와함께, 2023, pp.14-15에서 발췌] 즉 성서학에서는 사실 오늘날에 가톨릭과 메인라인{{{-2 (근본주의X)}}} 개신교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해석의 궁극적 책임은 가톨릭 '교회'에 있다고 가톨릭 신앙은 믿는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성전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예시로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외의 자녀가 있었는지의 해석 차이를 보자. 성서학적 분석{{{-2 ("인간 저자가 동시대 독자에게 1차적으로 말하고자 한 문필적 의미는 무엇인가?")}}}으로 말하자면, 성경 그 자체에서는 이를 알 수 없다. 어느 해석이 그나마 더 개연성 있는지 견해 차이는 학자 개개인마다 있지만, 남아있는 단서가 너무 적으니 성경 텍스트만으론 어느쪽으로도 확실하게 확답할 수 없다는 데는 가톨릭 학자이든 개신교 학자이든 동의한다. 하지만 평생동정이라는 성전에 근거하여,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만이 유일한 자녀였다고 확언한다. 물론 이는 성전이 성경을 찍어누른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부터 성경과 모순 없는 해석을 도출한 것이다. 가톨릭은 성경이 그 자체로 하느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도덕에 대해) 무오류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여기지만, 해석의 차원에서는 어디까지나 교회전승의 맥락 안에서 그 내용을 이해하라는 것. 교리 중에서도 성경에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이 아닌, 교회의 전승(성전)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내용들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로써 구전돼 온 전승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 성경에도 나와 있다. 가령 [[요한 복음]] 21장 25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고린토전서|코린토 1서]] 11장 2절 "나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전한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과 11장 34절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미리 먹어, 여러분의 모임이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그 밖의 것은 '''내가 가서 일러주겠습니다'''.", [[데살로니카후서|테살로니카 2서]] 3장 15절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신약성경|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디모테오후서|티모테오 2서]] 1장 13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등이 그렇다.] 한편 개신교는 가톨릭보다는 상대적으로 전통에 대해서 회의적인 관점을 취한다. 다만 가톨릭을 거부한다는 틀만 공통될 뿐, 개신교 역시도 사실은 각 교단의 내부 전통을 중시하며, 스스로의 교단이 성경에 대한 정당한 해석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실 [[루터교]]이든 [[장로교]]이든,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들은 자신들보다 급진적인 교단들에 대항하여, 성경의 해석 전통과 교부들의 권위를 호소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톨릭 교회에 대항해서는 성경의 자증성을 주장하며, 가톨릭의 해석 전통을 흔히 바리사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 입장 때문에 개신교 신학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딜레마]]를, 성공회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자조적으로 이렇게 평가했다. >성찬에 대한 개혁자들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는 관주도적 종교개혁[* (발췌자 주석) 공권력 주도적 종교개혁. 곧, 잉글랜드 성공회, 독일 루터주의, 스위스 개혁주의처럼 공권력{{{-2 (국왕, 영주, 시의회)}}}이 주도한 종교개혁을 말한다.]을 항구적으로 두 개의 운동으로 분리시키는 일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루터가 아주 단순하다고 여겼던 그런 성경구절들의 해석에서도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널리 증명해보였다.''' 1510년대 말과 1520년대 초에는 낙관적인 성경주석관이 일반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났다. '''그러나 1530년대 말에는 일반 그리스도인이 오직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숙하며, 복잡한 언어학적 이론들에 익숙한 경우에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 >...'''프로테스탄트 성경독자들은 성경해석의 수단으로서 어떤 '필터'를 제공받았다.''' 이러한 '필터'의 한 예로, 루터의 『소요리문답』{{{-2 (Lesser Catechism, 1529)}}}은 독자들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한 틀을 제공했다. 그런데 가장 유명한 성경 안내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ㅡ 특히 1529년의 최종판 ㅡ 였다. 이 책은 처음에 칼빈이 루터의 요리문답을 모델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41년도 불어판 서문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아가게 하는 열쇠나 입구와 같게 될 것"이라고 진술했다. '''달리 말해서 독자들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성경해석의 수단으로 사용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 >...'''쯔빙글리에게 쮜리히 시와 쮜리히 교회는 사실상 하나였고 동체였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이것은 그의 교회론 및 성례론과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시의회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개입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쮜리히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올바른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로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시의회는 사실상으로 그들이 ㅡ 교황이나 공의회가 아닌 시의회가 ㅡ 쮜리히 시민들을 위해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의도가 있음을 알렸다.''' 성경에는 실로 해석하기 애매한 경우들이 있는데, 시의회가 성경 해석자로 활동할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함에 따라 쮜리히 종교개혁의 정치적 성공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었다. 바젤과 베른에서도 쮜리히의 모델에 근거한 비슷한 결정이 내려져 스위스 종교개혁을 강화시켰으며, 1530년대 중엽에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칼빈의 종교개혁의 성공을 이끌었다. > >초기 개신교 내부의 세력 갈등은 성경해석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권위를 갖고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누구나 종교개혁의 다양한 갈래들의 이데올로기 ㅡ 곧 사회적, 정치적인 견해 ㅡ 에 사실상으로(de facto) 통제를 받고 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교황의 세속적 권위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권위 있는 성경해석자로서의 역할과 결부되어 있었다. > >.... 관주도적 종교개혁이 초기에는 각 사람이 성경해석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에는 사회적, 정치적 결과를 염려하게 되었다. '''1525년의 농민반란은 루터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에게 솔직히 개별 신자들(특별히 독일 농민들)은 성경을 해석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중요성을 그처럼 강조했다가 나중에 덜 교육받은 멤버들이 동일한 성경을 해석하게 될 것을(달리 말해서 관주도적 종교개혁자들과 다른 해석에 도달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성경으로 직행하는 일를 거부했던 것은 루터파 종교개혁의 아이러니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뷔르템베르트 공국의 학교규칙은 가장 유능한 학생들에게만 최종 학년에 신약성경을 배우는 일 ㅡ 라틴어나 헬라어로 배워야 했다 ㅡ 을 허락하도록 규정했다. 어쩌면 훨씬 다수였을 나머지 보통 학생들은 그 대신에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읽도록 규정되었다. '''직접적인 성경해석은 사실상 이렇게 소수의 특권을 지닌 집단의 몫이 되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그것은 성경 해석자로 교황을 지목하는가, 루터나 혹은 칼빈을 지목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성경의 명료성'의 원칙은 [[재세례파|종교개혁 내부의 보다 급진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했던 용례에 비추어 조용히 무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모든 사람이 신실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념은 결국 오직 급진파들만의 소유가 되었다. >----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씀, 최재건 번역,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s: An Introduction) 제3증보판 255-259쪽 개신교의 '성경 이외의 성전은 불필요하고 성경만큼의 권위를 지닐 수도 없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자체로 성경임을 완전하게 증거하기에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지닐 수 있다'는 자증성 주장에 대한 가톨릭(과 정교회) 입장에서의 반박은, '''그래서 도대체 성경 어디에 성경만이 교리의 유일한 바탕이 된다고 자증하는 내용이 있느냐?'''는 것. 역사적으로, (현재엔 외경이나 위경 취급받거나 교부들이 쓴 문헌들도 경전으로서 읽히던) 초세기 이후 AD 4세기 말에 성경 목록을 73권의 정경으로 확정한 건, 틀림없이 AD 1세기의 초대교회 시기부터 주교들과 교부들로부터 전승돼 온 [[거룩한 전통|성전]]으로 인한 '''[[공의회|보편교회의 권위]]'''이지, 성경의 어떠한 책 안에도 '무오류한 진리를 담은 정경 목록은 73권(혹은 66권)이다'라고 기록된 게 아니며 '성경의 각 내용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명시된 성경 구절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쓰여있지도 않다.[* 이에 대해 보통의 개신교는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라는 티모테오 2서 3장 16절을 근거로 들지만 이는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였기에 유익하다'는 내용일 뿐인 반면, 가톨릭과 정교회가 성경이 교회의 권위를 증언하는 것으로 여기는 구절은 티모테오 1서 4장 15절의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이러한 직접해석이 아닌 간접해석으로 인해 도출되는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교의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애초에, 시기적으로 뒤늦게 교회의 결정을 통하여 '''정경이 된 경전 목록'''을 '''신앙의 유일한 기준이자 척도'''로 삼는 것은 어떠한 역사적, 객관적인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선후관계를 거꾸로 뒤집기조차 하는, '''굉장히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믿음'''으로 본다. 1~2세기부터 작성된 여타 교부 문헌들에도 현재까지 교회에 남아 있는 여러 [[성사]]와 관습들의 핵심적인 형태가 교차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덤. 결국 자기 자신이 가톨릭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개신교 역시도 가톨릭에 대해, "오직 성경대로 따르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비성경적인 가톨릭"이라 비방하며 스스로를 대비시키듯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기보단, 실상을 따져보면 기존의 가시적인 [[보편교회]]를 대체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의 권위'''를 새로이 내세우고 [[거룩한 전통]](성전)을 대신해,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종교개혁|'개혁의 전통']]'''을 통하여 성경 외부의 관점을 사용해 성경을 해석하는 건 딱히 달라지지 않은 셈이라는 것. 또한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중요한 사실은, 가톨릭의 성경과 성전에 대한 관계에서, "교리의 '일부는' 성경에 있고 '일부는' 성전에 있다"고 가톨릭이 교의적으로 확정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해도 가톨릭 교리와 충돌하는 건 아니고 또한 매우 인기 있는 해석이지만, 트리엔토 공의회는 '''"이 진리와 규범이, 기록된 책들'뿐만 아니라' ... 전승들 안'에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2 (트리엔트 공의회 첫째 시기 제1교령)}}}'''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리의 모든 요소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성경 안에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가톨릭 교리와 모순되지는 않는다. > Sola scriptura[* 발췌자 주석: "오직 성경". 책에는 '성서지상주의'로 번역되어있으나, 발췌문에선 Sola scriptura로 옮겼다.]라는 원리는 궁극적으로 자기를 지양하는 공리이다. 적어도 그것이 무분별하게 이해될 때에는 그런 것이다. 이것은 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이 성서의 소위 축자영감론(Verbalinspiration)의 구상과 내적이고 필연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역사실증적으로 부당하며,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도 이제는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가 역사적이고 매우 분화된 모습으로서의 생성에서, 즉 독립해서 그것만으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직접 초래한 산물처럼 이해되는 한에서 사람은 성서에 교회의 생활한 증언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그런 권위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성서의 절대적인 축차영감설의 원리를 실제로 포기하지 않은 채, 또한 당시의 종교개혁 시대의 의미에서 Sola scriptura라는 원리를 견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든가, 또는 결국은 오직 Sola scriptura가 아니라 둘째 것, 즉 인간의 불가피하고 실존적인 영의 체험을 유일한 신앙의 원리로 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람은 이미 성서에서, 즉 구체적인 책들에서 참 성서(하느님 말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원리, 즉 고작 성서 형성의 동기를 부여하는 원리, 궁극적으로 성서를 형성하는 원리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 >......그런데 성서 그 자체가 성서를 증언한 교회 내의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성서에 쓰여진 것은 원래 모두 사도들의 선교이며 그밖에는 다른 어떠한 전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Sola scriptura라는 원리를 지지할 수 있다.''' 가톨릭 그리스도인에게도 전통과 교도직의 이해는 오직 성서 안에서만 그 내용을 이해할 원천과, "다른 것에서 규범을 받지 않는 규범"을 가진다. '''적어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시대에서는 성서에서 이야기되지 않아도 사도시대부터 전해진 특정한 신앙 내용을 중개하는 그러한 전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가톨릭의 교도직이 구속력을 가지고 가르치는 바가 아니며,''' 이에 관해서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한다고 해도 아직도 그러한 전통이 성서를 규범으로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가톨릭이기 위해 Sola scriptura라는 원리에 이론(異論)을 주창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톨릭의 교의학에서 말해도 인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정해야 할 원리인 것이다.''' >---- >- 카를 라너{{{-2 (Karl Rahner)}}}.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2 (Grundkurs des Glaubens)}}} 469-473쪽[* 라너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Sola scriptura는 자기 지양적인(자기 파괴적인) 공리이지만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Sola scriptura를 훨씬 단단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교리 차이는 아니지만, 성서학에 대한 현장 사목 환경에서의 분위기 차이도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성서학에 있어서는 오늘날 가톨릭 성서학자와 개신교 성서학자간에 딱히 차이랄 것은 없다. 흔히 한국 개신교가 근본주의라 하지만, 예장통합 쯤 되면 신학교에서 비평적 성서학을 교육한다.[* 다만 성서학이 현대에 수렴했다고 하더라도, 일선 평신도가 사적으로 가톨릭 바깥에서 성경 모임을 갖는 건, 규율 이전에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 등의 [[사이비 종교]]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설령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가 아니라 100% 개신교 신자라 하더라도, 일선 개신교 사목 현장과 가톨릭 사목 현장의 분위기 차이 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할 가능성이 높다. 개신교의 해석이 궁금하다면, 사적 만남을 가지기보다는 서구권 개신교 성서학자의 학술서를 읽는 게 낫다.] 그러나 개신교 특성상 안수 받고 자립한 목사는 신학교와 남남이며, 교리적 이단 시비가 걸린 게 아니라면 일선 목사가 누구 눈치를 볼 일은 없다. 따라서 "진화론은 창세기와 모순이다" 같은 매우 보수적인 현장 사목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가톨릭의 경우, 사제 서품 받은 후에도, 교도권을 매개로 대학 신학자들과 일선 사목자들이 강하게 연결된다. 때문에 비평적 성서학을 수용한 현장 사목 환경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현장 사목이 신학교보다는 보수적이긴 하지만, '''"진화론은 창세기와 모순되지 않는다"''' 같은 관점은 일선 사목자들과 가톨릭 평신도들에게도 상식적으로 이미 받아들여져있다. * '''성경의 권수 역시 다르다.''' 가톨릭은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을 합쳐서 73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반해, [[개신교]]는 구약 중 39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총 6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차이가 나는 7권의 경전은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그냥 동등한 정경으로 보지만 [[개신교]]에서는 '[[외경]]'이라고 호칭하여 정경에서 분리하고 있다. 현대의 개신교에서 외경을 아예 위경이나 금서로 치부하는 목사도 있고, 신학적인 가치가 있다는 목사도 있다. [* [[정교회]]는 구약 49권과 신약 27권을 합쳐서 7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성공회]]는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39권을 인정하고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정경은 66권이다. [*참고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유일한 종교적 교범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지 확인 불가한 출처가 부정확한 부분은 과감하게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경전은 초대 교회 시절 [[히브리어]] 사본을 찾아내지 못했고, 불가타 [[라틴어]]역을 저술한 [[히에로니무스]]도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제2경전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졌다. 이런 교부들의 불신을 반영해서 구약성경을 재편한 그는 우선적으로 구약의 헬라어 부분인 제2경전을 위와 같은 이유로 삭제했다. -[[연옥]] 문서에서 발췌. 그리고 제2경전의 히브리어 사본들이 [[사해문서|20세기에 발견되었다.]]] 권수가 다른 이유에 대한 더 자세한 것은 성경 문헌 참고. * '''기타 차이점''' 성경과 교회관을 빼면 나머진 전승의 수용여부나 여러 형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전구(기독교)|전구]]의 유무이다. 개신교는 [[성공회]] 고교회파를 제외하고는 [[성인(기독교)|성인]]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그렇기에 [[사도신경]] 중 [[라틴어]] "communionem sanctorum", 즉 "모든 성인의 통공"을 "모든 성도의 교통함"으로 번역하였다.], [[성모 마리아]]가 이 땅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고 여기는 반면, 가톨릭에서는 성전을 바탕으로 [[교황무류성]]을 통해 [[성모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으며 마리아가 일생을 보낸 후 죽음의 시기에[* 마리아가 들어올려질 때 사망했는지 살아있었는지는 특정되지 않았다.] [[에녹]]과 [[엘리야]]처럼 승천을 했다고 믿기 때문에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마찰이 빚어진다. 정교회의 경우 전승으로 인정하는데, 이를 명확히 설명하는 교리가 없다.[* 성모 마리아가 사망한 후 사도 토마스가 마리아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비칼케돈파나 네스토리우스교는 역사적 증거가 없기에 성모몽소승천을 부정한다. [[개신교]]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성모승천]]이 외경을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성모몽소승천을 부정하는 한편, 가톨릭에서는 초기 교회 시기부터 내려오는 성전을 바탕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을 때에 동정녀로써 승천하였다고 선포하였다. 5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서로 간의 교리적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해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자체가 아직 없었던 시절의 고대인들은 선하게 살았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세례]]받지 못한 유아나 의로운 고대인들이 가는 ''''[[고성소]]''''가 있다고도 했었으며, [[단테 알리기에리|단테]]의 [[신곡]]에서도 고성소가 언급된다. 이 고성소라는 공간은 지옥은 아니지만 천국도 아니며, 참된 기쁨인 '지복직관(하느님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그 나름의 평화와 안정을 얻는 장소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고귀한 자리를 함부로 버린', 즉 자진 퇴위한 죄로 고성소에 들어가 있다(그런데 현실에선 훗날에 [[첼레스티노 5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축일은 [[5월 19일]]). 하지만 고성소 자체가 [[신학]]적 가설일 뿐 가톨릭 기준으로도 '믿어야만 하는 교리'는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고성소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기존에 고성소에 갔으리라 말하던 영혼이 실은 모두 천국에 있으리란 것. 교황청 신앙교리성 산하 자문기구인 국제신학위원회는 [[http://m.cpbc.co.kr/paper/view.php?cid=182851|무죄한 아기들을 천국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림보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제한된 구원관"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성소에 대한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황]]이나 [[교황청]] 등이 공식적으로 선포하지 않는 한 가톨릭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고성소를 믿든 믿지 않든 아무 지장이 없다. 믿지 않아도 이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개신교에서는 구원의 철회, 탈락 문제가 만년 신학 논쟁 대상인데, 가톨릭에서는 논의의 가치도 없이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주제다. 세례를 받고 사함을 받았어도 대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외 ''''[[연옥]]의 존재 여부''''와 ''''[[성모 마리아]]의 위상''''에 대한 오해가 있다. 연옥은 가톨릭 교리에서 인정하는 것으로 지옥에 떨어질 정도의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모자라는 사람을 위한 장소로, 일종의 [[속죄]]의 장소이자 천국으로 가기 위한 이전단계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즉 대죄를 짓게 되면 지옥으로 가는 직행열차를 타지만, 대죄를 인지하지 못하게 짓거나 자잘한 소죄만을 지은 경우 바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옥]]에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정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만이 사후에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시, 죄를 지은 순서로 사람을 1열로 세우게 되면, 어느 선에서 천국행과 지옥행이 갈라져서 아깝게 지옥에 가는 사람과 석연치 않게 천국에 가는 사람이 발생하게 되는데, [[연옥]]은 이러한 비합리를 해소하게 해준다. 죄를 지은 가톨릭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진심으로 참회하게 되면, 죄의 용서는 받으나 죄에 대한 대가는 남아있게 되는데 이를 잠벌이라 한다. 만일 살아서 이 벌을 다 갚지 않으면, 즉 기도와 선행 등으로 보속하지 않으면 남은 벌은 연옥에서 갚게 되는 것이다. 이 잠벌의 용서는 [[주교]]나 [[교황]]이 조건부로 주는 [[대사]]를 받으면 가능하되, 이를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양도 가능하다. 죽은 신자가 연옥에서는 더 이상 선행이 불가능하므로 오로지 은총으로만 영혼이 정화되는데, 살아있는 신자들의 대사 양도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연옥에 머무르는 영혼은 자신의 기도와 천국에 소속된 이들의 기도, 그리고 이승에 속한 이들의 기도로 천국에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연옥은 위의 고성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파일:external/www.catholicsun.org/pope-fatima.jpg]]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절대 예배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당장 [[성모송]]의 끝구절부터가 "저희를 구원하소서"가 아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이다. 간혹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에서는 '반드시'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거쳐서만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지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한다.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신자들은 정확히 말하면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성모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신 하느님에게 기도한다라고 하지만. [[사도신경]]의 구절 중 하나인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에서 알 수 있듯, 가톨릭 신자들은 천국에 소속된 이들이 우리를 위해 하느님에게 간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도움을 받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 뿐 아니라 천사나 성인들의 이름이 들어가는 기도 또한 다양하게 존재한다. 단 그들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것이지 절대로 그들에게 구원을 해달라거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는 기도와는 달리, 자신들을 위해 하느님에게 빌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와 [[성인(기독교)|성인]]은 신앙의 모범이고 공경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가톨릭에서는 성모 4대 교의에 의해 마리아의 원죄 없음(성모무염시태)을 따를 교리로 선포했으며, 이는 공경의 대상을 넘어 원죄가 없음을 고백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절차를 기다리고있다. 성경은 예수 이외의 원죄 없으신 분을 언급하지 않기에 이는 교리적 논쟁의 씨앗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한 성전(聖傳)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 교리 관점에서 본 주장이며, 가톨릭 교회는 과거 공의회로부터 성모 4대 교의를 믿을 교리로써 확립하였다.] 공경의 근거도 어디까지나 그들이 하느님에게 충실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음에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이런 [[성모 마리아]], [[성인(기독교)|성인]]의 개념은 물론 그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하느님에게 빌어달라는 뜻인 [[전구(기독교)|전구]]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전구가 없는 개신교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뜻을 가진 문장으로 마치는것 만이 인정된다. 개신교에서는 전구 대신 서로를 위한 기도로서 중보기도가 있으나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뿐이므로 중보기도라는 명칭은 비성경적이라는 논란이 있어 대신 도고기도, 청원기도 또는 이웃을 위한 기도 라는 명칭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가톨릭과 [[정교회]]는 [[미사]], 기도, 또는 마음을 다잡거나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성호경]]과 함께 십자성호를 긋지만, 개신교에서는 하지 않는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호 긋는 순서와 의미는 조금 다른데, 자세한 건 [[성호]] 문서를 참조. 그 외 가톨릭의 성당은 성상이 존재하며, 일반적인 [[십자가]]뿐만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형태의 [[십자고상]]을 사용하는데, [[개신교]]의 경우는 [[성공회]]와 [[루터교회]] 정도를 제외하면[* 다만 이 두 교파도 십자가만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예수]]가 없는 [[십자가]]만 사용한다. 가톨릭에는 [[7성사]], 즉 [[세례성사]], [[견진성사]], [[미사|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가 존재한다. 반면 [[개신교]]는 [[세례]]와 [[성만찬]]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성사적 예식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성품성사는 가톨릭 사제로 임명하는 의식이며 [[고해성사]]는 신자가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는 의식이다. 성체성사는 [[미사]]라고도 불리며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친 것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제사이다. [[미사]]의 후반부에 [[영성체|성체를 신자들에게 나눠주지만]] 성체를 신자들이 함부로 다루는 것을 금하고 있다. 또한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하지 않은 신자, 신자가 아닌 자에게는 성체를 주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개신교]]의 예배에서는 성찬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특별히 행해야 하는 날짜가 정해지진 않았다. 그리고 만인제사장을 인정하는 이유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는 없다. || || 가톨릭 || 개신교 || ||성경 [[https://1drv.ms/t/s!AvHkMxuSUk3xhhFG9dY0gQSnZy8_|전문 다운로드]] || 73권 || 66권 || ||믿음과 선행 || 후술 || 후술 || ||[[성모 마리아]] ||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평생동정, 무염시태(원죄없음), 성모승천 ||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만 인정[* 예수의 육적인 어머니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렇게 되면 개신교는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네스토리우스가 되며 칼케돈파가 아닌 비칼케돈파가 된다. 어쨌든 예수의 신성과도 관련되기 때문에 테오토코스를 공식적으로는 인정. 성모 마리아에게는 육체만 취했지만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없이 모두 낳았기 때문이다.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면 네스토리우스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신성을 낳은 성모 마리아는 성자 예수와 같은 위격인 성부 하느님의 어머니도 된다. 별도로 [[성공회]]는 [[테오토코스]]는 당연히 인정하고, 무염시태, 평생동정, 성모승천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성공회 신자 개인이 무염시태, 평생동정, 성모승천 신앙관을 취하는 것을 이단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 개신교]]만은 끝까지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라 하고 있다.] || ||[[성직자]] || [[주교]](독신), [[신부(종교)|신부]](독신), [[부제]] ([[남자|남성]]만 가능) || [[성공회]]와 [[루터회]]에만 있음[* 근본적으로 만인제사장을 받아들이므로 그리스도와 평신도 사이에 사제는 필요없다는 입장. 평신도이자 일종의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가 대체. 사제는 아니지만 설교와 [[예배]]를 할 독점적 권한은 있다. 무교회주의나 침례회 아니면 일반 장로급은 이런 일을 하는데 매우 제한적이다. 남성만 목사가 되는 교파도 있고, 여성 목사를 허용하는 교파도 있지만 일반적인 개신교와는 다르게 성공회, 루터회는 이런 사제 제도가 있다.] || ||[[수도자]] || 수사/수녀(독신) || [[성공회]]와 [[루터회]]에만 있음 || ||[[십자성호]] || 있음 || [[성공회]]와 [[루터회]]에만 있음[* 해외에서는 감리회 교인들도 십자성호를 긋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국내의 감리회 교인들은 전혀 하지 않는다.] || ||[[묵주]] || 있음 || [[성공회]]와 [[루터회]]에만 있음[* 단 [[루터회]]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다. 구습이 많이 남아 있는 일부 [[북유럽]] 루터교회 정도에서만 존재] || ||[[성상(조형물)|성상]] || 있음 || [[성공회]]와 [[루터회]][* 다만 두 교파 모두 성상 없는 인테리어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재로 성상을 설치하지 않은 예배당도 존재한다. 특히 루터회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교회에는 성상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또한, 루터회의 경우 크기가 큰 성상은 거의 없으며, [[예수]]상 이외의 성상은 거의 만들지 않고, 공경하거나 성상에 직접 기도하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에만 있음 || ||[[십자고상]] || 사용 || [[성공회]]와 [[루터회]][* 다만 루터회는 십자고상이 설치된 교회도 있으나, 다른 개신교 교회와 같이 십자가가 설치된 교회도 많다]를 제외하고는 [[십자가]] 틀만 사용하거나, [[십자가]] 또한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 ||[[7성사|성사]] || [[7성사]] 모두 인정 || [[세례]]와 [[성만찬]][* 횟수는 교단마다 다르다. 성공회는 2개만 정식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5개는 준성사(예식)로 취급한다.]만을 인정 || ||[[고해성사]] || 있음 || [[성공회]]와 [[루터회]][* 단 루터회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다. 가톨릭 전통이 남아있는 일부 루터회에서만 시행.]에만 있음 || ||교단/종파 || 단일[* 동방 가톨릭을 예로 들며 종파가 여러 개가 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동방 가톨릭은 교황의 수위권에 속해 있는 엄연한 가톨릭 교회와 일치된 종단(宗團)이다. 전례의 형식이 다를 뿐이다. 물론 정교회에서는 동방 가톨릭의 교황수위권 인정을 반대하지만. 또한 [[구 가톨릭교회]], [[성 비오 10세회]] 등의 공동체를 가톨릭 교회의 일부로 인정한다면, 가톨릭 내부에서도 이상적인 일치 상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 다양하게 존재[* 감리회, 장로회, 루터교회, 성공회 등이 존재한다.] || * 목사가 혼인이 가능한 것에 대해 개신교에서 말하는 만인제사장설에 따르면, 목사는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하자면 성직자와 평신도의 영적인 구분을 부정한다. 즉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모든 신자는 사제라는 말로서, 각자 맡은 직무만이 다를 뿐이라는 교리다. 가톨릭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평신도 사도직'이 존재한다. 하지만 목사와는 다르다. * 라틴 가톨릭 교회에서만 성직자 독신이 의무이다. [[동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결혼한 사제도 성직자이며, 별거를 하는 조건으로 주교도 될 수 있다. [[오리엔트 정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에서도 성직자 독신은 의무가 아니다. [[구 가톨릭교회]]도 독신제를 폐지했으나, 가톨릭이 아니라는 비판은 일부 국가교회의 여성 사제 안수부터 듣기 시작했다. * [[혼인성사]]는 성례([[개신교]]에서 성사를 일컫는 말)로 인정받지 못한다. '''교회에서 결혼 안 한 사람은 혼인한 게 아니냐'''는 문제가 있기 때문. 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린다고 다 성례가 아니라, 교회의 표지로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행사라야 성례로 본다. * [[장로회]] 중 보수적인 교단[* 한국의 경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등 보수 성향 장로회의 상당수. 다만 [[예장합동]]을 제외하고는 교회당 내 [[십자가]] 거치 금지를 교단헌법에 명시하지는 않았다.]이나 [[침례회]]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십자가]]를 교회 밖에서만 예배당의 표지로 쓰고, 교회당 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간주한다. 다만 장로회 중에서도 에큐메니컬 성향의 교단[*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등이 대표적.]에서는 교회당 내에서도 십자가를 쓴다. 물론 [[감리회]]나 그 영향을 받은 교단[* [[성결교회]], [[구세군]], [[오순절교회]] 등.]에서는 [[십자가]]를 사용한다. 교파마다 다르다. * [[테오토코스]]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물론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보다 높다거나 하느님 이전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을 낳는 은총을 누린 여인이라는 뉘앙스다. 대다수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또한 하느님이다. '''마리아가 예수의 인성만을, 혹은 육체만을 낳은 것이라는 주장은 이단'''이 된다. 성자가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육체를 취했다는 것은 맞으나, 그 결과로 마리아가 낳은 것은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인성과 신성이 겸비된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하나의 실체이므로, 인간만을 낳았다는 말은 잘못된 주장이다. 이런 교리가 정식화된 것은 초창기의 [[네스토리우스파]] 이단과 관련이 있다. 근데 가끔 [[칼케돈 공의회|칼케돈 신조]]를 인정한다면서 테오토코스에 회의적인 개신교 신자도 눈에 띈다.[* 그런데 당시 고대 그리스의 영향권에서 여신 숭배가 광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네스토리우스도 교리적으로 위에 서술된 정도의 내용을 명확히 아는 신자들이 테오토코스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려해서, 안티오키아 주교가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여신 숭배를 억누르기 위한 용어로 제시한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여신 마리아가 신과 관계를 맺었다는 그리스 신화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헌이 있다. 출처 : 크리스토프 바우머, 안경덕 옮김,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 서울, 일조각, 2016.] * 한편 주된 교리의 차이와는 별도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차이점으로 '''[[술]], [[담배]] 등에 대한 허용'''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교파마다 교리가 다양해서 술담배 등에 대한 입장도 다양하지만 [[한국의 개신교]]에선 음주 및 흡연을 기본적으로 자제할 것을 권장한다. 음주의 경우 (에페 5:18)[*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을 근거로 한다. 흡연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도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1고린 3:16~17)[*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을 들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주술의식에 사용하던 행위를 할 수 있겠냐는 입장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주술의식에 사용하던 것을 서양(유럽)인들이 기호품화 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나 신대륙 발견 이전부터 이미 남유럽에서 자생했었다는 설도 일부에서 제기된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이 개신교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언제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정도로 (현재 개신교인들도 생소한 이야기일 정도로) 현재 다루지 않는 입장이다.] 혹은 같은 구절을 두고 자신의 몸을 헤치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목사]] 등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보수적인 신자들은 [[술]]과 [[담배]]를 하는 경우 그 사실을 숨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개신교 신자 중에서도 음주 흡연자가 꽤 많고, [[장로회]]의 창시자인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지독한 골초였으며 포도주를 즐기는 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가톨릭에서는 [[술]], [[담배]]에 비교적 관대해서 성직자들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 2290항에 의거, 흡연과 음주, 약물의 '남용'을 금지하고 있다.] [[술]]이나 [[담배]]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에서 [[돈 까밀로]] 신부가 [[시가(담배)|시가]]와 [[포도주]]를 즐길 수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