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대한민국 (문단 편집) ==== 청년 신자 수 감소 ==== 한국 교구들의 많은 공동체에서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쳐 신자 수가 계속 줄었다고 말한다. 교계 언론사나 일반 언론사들도 이를 자주 보도한다. * [[https://news.cpbc.co.kr/article/849460|주일 미사 참여자 70% 수준 하락… 청년 신자 이탈 가속화]], 가톨릭평화신문, 2023-03-23. *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111512691|젊은 신도 줄고, 성직자 늙고…종교계도 고령화 '시름']], 한국경제, 2022-11-15. 이러한 현상은 사제성소나 수도성소 감소로도 이어진다.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77993|위기의 신학교 현황과 대안은]], 가톨릭신문 제3331호, 4면, 2023-02-19. 어느 누구도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러므로 해결책은 이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몇 가지 감안해야 할 점만 열거하고자 한다. 첫째, 애당초 대한민국의 연령별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957|「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2」]]에 의하면 20-24세와 25-29세인 신자 수는 각각 228,004명과 385,706명으로 나타났으며, 60-64세와 65-69세는 각각 579,473명과 520,053명으로 나타났다. 20-29세 신자 수가 60-69세 신자 수의 절반 수준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주민등록인구 대비 신자 연령별 비율은 20-24세와 25-29세에서 각각 7.8%와 11.1%이며, 60-64세와 65-69세에서 각각 13.7%와 16.3%이다. 60대의 천주교 신자들 중 30세 이후에 세례받은 신자도 있음을 고려하면 이 비율 차이가 유의미한 정도로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 청년층이 신앙 생활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인구 감소에 따라 청년 천주교 신자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숫자의 감소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결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대신 청년 사목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 2020년대의 신자 수가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예전 신자 수가 너무 늘었던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1980년대는 가톨릭 청년 단체가 굉장히 활성화되었던 정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 여파는 90년대 말까지 이어졌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는 교구나 수도회의 성직자/수도자가 제법 배출된 요인 중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2020년대의 청년 신자 수가 '그때에 비해 줄었다.' 혹은 '그때의 청년 신자 수가 정상이고 그걸 기준으로 볼 때 지금은 줄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까? '그때의 청년 신자 수가 원래 생겼어야 하는 신자 수보다 훨씬 늘어났다고 볼 수는 없을까?'라고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가 지금보다는 덜 발전했던 시기에 종교는 그 부족함을 채워줬으며, 한국 천주교도 그중 하나였다. 자연히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1950년대 후반에 한국 천주교가 구호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다보니 '밀가루 신자'[* [[https://aos.catholic.or.kr/bbs43151/97|『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8. 교장신부 시절과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가 생겨난 현상과 비슷하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 입교하여 신심 깊은 신자가 된 이들도 많았지만, 급격히 증가한 그 신자 수에 '거품'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신자 수가 급격히 늘었던 그때를 기준으로 삼아서 '지금은 줄었다.'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처럼 천천히 발전하는 것이 본래의 수순이고 그때가 특별했던 것이다.'라고도 바라봐야 한다. 셋째, 청년 신자가 왜 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다. 청년 신자가 줄어서 걱정이고,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지는 많이 고민하지만 거기에 '왜'가 빠져 있다. 이 고찰에는 '청년이란 무엇이며, 그 범위는 어떻게 되는가?'와 '청년 자신들을 위하기보다는 단지 교회의 이득을 위해 (봉사할 사람이 없으니, 혹은 그럴 듯한 통계 자료를 만들기 위해) 청년을 부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포함된다. 이 문제는 『요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이었던 "사람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났느뇨?"-"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를 청년 사목에 맞게 풀이하면, "청년들이 (1)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2) 자신의 영혼을 구한다."라고 쓸 수 있다. 지금의 청년 사목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은 이러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