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도특설대 (문단 편집) ===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복무 의혹? ===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무한 적 없다.||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맞지만, 한땐 여기에 더해 간도 특설대에 복무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주재덕의 서적 탄백서[* 중국어로 坦白书.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라는 뜻인데 정치적으로 자아비판하는 책이란 뜻으로도 쓰인다.]에서 박정희가 간도 특설대원으로 근무하였다고 적힌 것을 보았다고 차상훈이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의 결전편에서 증언을 실었다. 탄백서란 내용을 바탕으로 한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설의 골자는 1939년 대사하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훈장까지 받은 간도특설대원 마츠모토란 인물이 있는데 그 인물이 박정희가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가 간도에서 독립군 토벌하러 나갈 때마다 "요시 토벌이다!"(...)라는 전투함성을 지르곤 했다는 루머도 퍼졌었는데, 이 떡밥을 물었던 것이 반박정희 성향의 재미 언론인 [[문명자]]와 만화가 [[백무현]], 그리고 과거 박정희 항목의 편집에 참여한 일부 유저들이었다.[* 혹자는 망언과 날조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의 발언을 별다른 의심의 여지없이 증거라고 올려놓기도 했다.(신타로는 박정희한테 일제 시절을 호의적으로 평하는 말을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으나 당시엔 시행하지 않은 의무교육을 들먹이는 등 이마저도 불분명하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 설에서도 정작 박정희의 이름이나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박정희는 1939년 9월까진 교사로 근무했고 동년 10월에 시험을 쳐서 1940년 4월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당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탈락시켰으나 요새 말로 재수를 하면서 혈서를 쓰고 합격한다.]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마츠모토란 자는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부터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것은 1940년 2월 17일인데 창씨개명을 하기도 전이고 군관학교 입학을 하기도 전인 1939년에 전투에 참여해서 일본 이름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마이뉴스의 기자 [[정운현]]과 연변의 역사학자 박창욱도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설을 조사한 끝에 간도특설대 명단에 박정희는 없으며 임관 이후 만주군에서 전투에 참여한 기록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http://blog.ohmynews.com/jeongwh59/288615|#]][* 현재는 삭제되어있다.][* 다른 자료 [[http://blog.daum.net/hweck/7476093|#]].] 그외 박정희와 같이 복무했던 조선인 장교들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0049417&|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단(연대) 을종부관[* 단장(연대장)을 보좌하는 것도 아니고, 단장을 직접 보좌하는 상위(대위) 계급의 '''갑종부관을 보좌'''하여 단기(연대기) 관리 및 명령 전달 임무만을 하는 --꿀--보직이라고 한다.]이라서 직접적인 전투 경험은 없었다고 한다. 마츠모토란 자의 정체도 박정희가 아닌 현학춘이란 자로 밝혀졌다. 애초에 마쓰모토가 무공훈장을 받은 건 '''전사해서 추서받은 것이다'''. 따라서 다샤허 전투 이후에도 살아있었던 박정희가 마쓰모토라는 것은 조금만 탐구를 한다면 바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분류:만주국]][[분류:만주군/조선인]][[분류:해체된 군부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