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바 (문단 편집) === 황제에 오르기 전까지의 경력 === 네로가 몰락했을 때, 갈바에 대한 기대치가 대단했던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이나 갈바의 즉위 전까지의 삶은 대단했다. 갈바의 본격적인 공직 생활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부터 시작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말년에 그가 황제가 될 거라는 소문 탓에 죽을 뻔 했지만 티베리우스가 쿨하게 무시해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이 말을 듣고 괜찮다. 그 녀석을 살려줘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서기 11년 집정관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와의 사이에는, 아들 두 명을 뒀는데 부인과 아들 모두 [[클라우디우스 1세]] 재위 연간에 사망해 일찌감치 홀로 됐다. 그러나 갈바는 재혼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 수에토니우스와 같은 이들은 갈바가 노년이 되어 [[양성애]] 성향을 갖게 된 것을 증거로, 갈바가 여자보다 남자를 성적 대상으로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갈바는 적어도 친구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까지는 사생활적인 측면에서 또래 귀족들이 흠으로 여길 만한 일을 극도로 사린 인물이었다. 갈바는 전형적인 명문 귀족이었다. 성품 자체도 크게 모나지 않았고, 예의바르고 교양도 풍부한 데다 법학 지식도 해박했다. 그렇지만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 귀족들도 거의 하지 않던, 이미 없어진 관습조차도 아주 잘 따르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갈바의 집안 시종들은 공화정 중기 귀족의 시종들처럼 예법을 지켜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성향은 갈바가 늘 예의를 갖추고, 언행을 하는데 큰 힘이 됐다. 그는 노년에는 늘 과식을 하고, 겨울에는 해가 뜨기 전에도 음식을 먹으며 연회를 즐긴 악습으로 유명했으나, 중장년까지의 갈바는 엄격한 삶 아래에서 적절히 식사하고 저녁 식사를 하면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시종과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그들이 배를 굶지 않게 신경써서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는 진심으로 늘 예의를 갖춘 갈바를 칭찬했고, 죽으면서 공개한 유언장을 통해 자기 사람인 갈바에게 5천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을 은사금으로 상속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일가 남녀황족들도 비슷해, 황실 사람들은 그를 좋은 귀족, 휼륭한 협력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갈바의 형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의 능력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어머니 리비아가 유언장에 적어 내린 갈바에 대한 은사금이 능력에 비해 과하다며 이를 크게 깎았다. 따라서 갈바는 5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받게 됐다. 갈바는 말년 머리숱이 거의 없는 대머리에, 손과 발은 통풍으로 굽어지고 변형돼 신발을 오래 신을 수도, 책을 펴고 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오른쪽 옆구리에는 살이 늘어나고 혹처럼 커져서 붕대로 고정해 이를 숨길 수도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젊을 적에는 평균 키에 파란눈을 가진 평균 이상 외모의 로마 귀족으로, 대머리도 아니었고 구부러진 코를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멋진 몸가짐을 가진 귀족이었다. 더욱이 [[칼리굴라]] 황제 시절에는 전차 경주와 전차 운전을 좋아한 황제과 레누스 강 전선에서 나란히 전차를 몰면서 전장을 지휘할 정도로 운동 능력도 상당했다. 이런 까닭에 한때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재혼 상대로 유부남이던 젊은 갈바를 점찍고, 그에게 진지하게 접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장모가 소 아그리피나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황족인 그녀를 상류층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의외로 상류층 여인들에게 아내와 사별한 뒤 재혼 상대로 거론되지 못했고, 즉위한 이후에도 홀로 살았다. 그는 법무관에도 못 올라간 할아버지와 달리 [[티베리우스]]-[[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의 치세를 거치면서 법무관, 집정관(콘술), 황제 수행원, 군 지휘관, 원로원 속주 총독 등 로마 귀족들이 거칠 수 있는 명예로운 경력을 죄다 역임하며 좋은 평판을 얻었다. 또래 귀족들보다 이른 나이에 공직 경력을 시작한 그는 법무관 때 코끼리까지 동원한 축제까지 완벽하게 수행해냈고, 휼륭하게 법무관으로서의 업무도 수행했다. 이후 그는 네로의 친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 이어 집정관(콘술)이 되었고[* 갈바의 후임은 공교롭게도 갈바의 후임 황제인 오토의 아버지였다.], 칼리굴라 생전에는 군대 지휘관과 속주 총독으로 있으면서 엄하고 고된 훈련을 시키는 등 군율을 엄하고 공정히 다뤄 칼리굴라와 원로원에게 칭찬을 받았다. 갈바는 황숙 클라우디우스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친구였다. 따라서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황제의 친구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허나 갈바는 오랜 친구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고,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이득을 챙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기 49년(혹은 50년 또는 51년) 경, 일시 은퇴해 공직에서 물러났다.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고 네로가 친위 쿠데타로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에게 옹립되는데, 갈바는 59년(또는 60년), 네로의 명령과 간청 아래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돼 다시 복귀하게 된다. 이때 그는 로마에선 상당한 고령인 육순이 넘었는데, 꽤 오랜 세월동안 은퇴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행정 능력을 발휘해, 로마 원로원과 민중에게 이름을 다시 한번 알리고 큰 존경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