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리교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감리교신학대학교 시대([[1993년]]~현재) === [[1992년]] [[7월]]에 변선환 [[학장]]이 종교재판의 후유증 속에서 정년 은퇴와 동시에 임기 만료로 퇴임하게 되고 이어 [[구덕관]] [[교수]]가 [[학장]]직을 승계하였다([[1992년]] [[8월 10일]]). [[1993년]] [[3월 1일]]에는 교명이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개칭되고, [[학장]]은 [[총장]]이 되었다. [[구덕관]] [[총장]]은 취임사([[1992년]] [[9월 10일]]자 학보)에서 학교의 후진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발전 계획에 대해 밝혔는데, 오해가 다분한 발언들로 학생들의 큰 불만을 샀다. 변선환 [[학장]] 시절인 [[1990년]] [[3월 12일]]에 이사회에서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원당리에 제 2캠퍼스를 개발하기로 가결하였었는데, 이 계획이 이때 알려져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구덕관]] [[총장]] 퇴진 운동으로 이어져 [[구덕관]] [[총장]]은 결국 [[1994년]] [[10월]] 퇴진하였다. 이때 감신대 제 2캠퍼스 계획이 엎어지자 음성군은 1995년에 [[개혁신학교]]를 유치했는데 재밌게도 개혁신학교는 파행운영과 내분으로 '''1년만에 폐교되었다'''. --감신대 학생들이 앞날을 내다본건가.-- 그후로 음성군은 신학대학을 결코 유치하려 하지 않는다. 구덕관 총장이 퇴진한 후, 이종수 감독이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 [[1998년]]의 전국대학종합평가와 건물 확보를 위해 백주년 기념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종전에 각종 집회가 열리고 학생들의 담소 공간이었던 아레오바고를 헐고 그 자리에 지상 7층, 지하 3층의 규모로 계획되어 1999년 완공하였다. 완공 이후 교수 연구실과 김용옥 학장 기념관에 있던 도서관 등이 백주년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이종수 감독이 약 2년의 짧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고 [[1997년]] 염필형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0년]]에 김득중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3년]]에 웰치 채플을 헐고 그 자리에 웨슬리 채플을 지었다. 웨슬리 채플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1,5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와 현대적인 모습으로 지어졌다. 웨슬리 채플 건립 시,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들어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학생회는 웰치 채플을 보존하고 운동장 자리에 지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웨슬리 채플이 완공된 후 같은 해부터 장천 김선도 감독의 헌금으로 새 [[기숙사]] 건축을 시작하였다. [[2004년]],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실시했다. 신입생은 과 배정 없이 신학부로 편성되어 2학년 때부터 신학, 기독교교육학, 종교철학 세 전공으로 나뉘는 체제로, 2004학번부터 적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없는 학교 측의 일방적인 실시로 또 다시 학생회와 학교가 큰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학부제 실시로 인해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가 어려워지고 학우들 간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에 김외식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비아돌로로사가 건립되고, [[2005년]]에 주차장이 완공되었다. 또한 새 기숙사가 완공되어 '장천생활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김외식 총장은 감신의 국제화를 내세워 여러 외국 학교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외국 학생들의 교육 프로그램(International Church Leader Program, 약칭 I.C.L.P. 후에 Internation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약칭 I.G.S.T.로 개칭)을 신설하였다. IGST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도 아프리카 및 중국, 미얀먀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드리는 영어예배는 화·목요일에 있던 채플에 이어 제 3의 채플로 마치 대안채플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2008년]]에 김홍기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1]] 여름에 김홍기 교수가 합창단과 함께 감신 발전 모금을 위하여 미국 순회 연주를 다녀왔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실제 모금된 금액도 없을 뿐더러 모금한 금액과 예산을 배임 및 횡령을 했다는 이유로 공청회를 열게 되었다. 공청회 이후 횡령에 대한 의혹은 벗었지만 배임에 대한 과오가 있어 김홍기 교수는 게시판에 사과문을 게재하였다. [[2012년]]에 박종천 교수(조직신학)가 감신대 13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5년]]에는 감신사태가 벌어졌다. 송성진 교수가 K교수의 논문 표절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사회에 단독으로 들어가 K교수의 승진탈락과 재임용을 탈락시키는 만용을 부렸다. 이와중에 법인처 직원K와 기독교윤리 L교수가 이사장 권력을 등에 엎고 고속 승진[[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51|출처]]을 했다. 당시 이규학 이사장은 교수들을 줄을 세워 관리해야한다는 망언과 여자 목사들은 불독같이 생겼다는 막말[[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02|출처]]을 해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는 법인처를 점거하고 농성했다. 이때 이규학이사장 퇴진요구를 했다. [[2016년]], 13대 총장이었던 박종천 교수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이사회의 거듭된 파행으로 후임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였다.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자 교무처장인 이환진 교수가 총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사회가 파행된 이유는 한국 감리회의 자유주의 세력과 복음주의 세력이 각자 지원하는 총장 후보가 각기 달랐고, 서로 간에 심각한 공격이 자행되어 이에 반발을 품은 일부 이사들이 총장 선출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몇 차례에 걸친 총장 선출은 정족수가 미달되어 선출되지 못한 것이다. W교수가 논문표절로 총장이 될 수 없어서 후보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자유주의 세력들이 W교수를 밀어주면서 총장선출에 난항이 계속되었다. 특히 광림교회 김정석목사는 2015년 대자보를 붙이면서 이규학 이사장에게 반기를 들었고 김정석목사는 자유주의 세력을 계속 밀어주었다. 하지만 결국 W교수는 총장후보에서 논문표절 때문에 탈락했다. [[2017년]] 10월 10일 개최된 2017년 제 10차 이사회에서 영등포중앙교회 김진두 목사가 제 14대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날 임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이사회의 합법성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사회의 일부인 9인 이사회와 학생비상대책위원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현재 김진두 총장은 여전히 직무를 수행 중이며 새로 보직교수도 임명하여 학교 일을 꾸려가고 있다. 또 12월 14일 열린 감신 총동문회가 개최한 2017 송년의 밤에서 김진두 총장과 학생비대위장이 감신 정상화를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사태가 일단락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469|출처]] ... 인줄알았으나 총장의 돌연 사임으로 학교가 다시 시끄러워졌다.[[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467|출처]] 이런 파행이 있은 후 총장을 다시 뽑게 되었는데 이후정 총장이 당선이 되었다. 선출과정에서 감신의 역사 최초로 학생들이 직접선거를 하였다. 김진두 전 총장과 이사회가 일정부분 화해를 하였는지 현재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