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표적 (문단 편집) == 개발 == 1931년 11월에 일본의 함정본부(艦政本部) 제1부 제2과에서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가상적인 미군보다 약한 일본군 해군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궁리했다. 아이디어의 방향은 주로 주력함끼리 함대결전이 일어나기 전에 적 해군의 전력을 깎아내릴 수단을 찾고 개발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중에서 갑표적의 원안이 된 것은 요코 다카요시(横尾敬義) [[예비역]] 해군[[대령|대좌]]가 제안한 어뢰육공안(魚雷肉攻案)이다. 이 방안은 어뢰에 인간이 탑승해서 조종함으로서 목표물에 어뢰를 확실하게 명중시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중에 나오는 [[카미카제]] 병기인 [[가이텐]]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이 방안은 해당 과의 조직원들의 관심을 모았으나, 당시의 일본군 해군은 아직 정신상태가 그럭저럭 양호한지라, 자살특공병기는 사용하기 꺼림칙해하던 상황이었으므로 해당 방안을 소형 잠수정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 외에 [[X-MAS|이탈리아 해군의 항구침투방식]]이나 민간 잠수장비등의 영향도 갑표적의 초기안을 잡는데 영향을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1931년 12월에 함정본부 제1부 제2과장에 키시모토 카네지(岸本鹿子治) 대좌가 부임하면서 갑표적의 개발이 결정되었다. 기초 설계는 아사쿠마 도시히데(朝熊利英) 조병[[중령|중좌]]가 담당했는데, 스스로는 이런 무기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질 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위에서 지시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므로 설계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1932년 6월에는 길이 12m의 모형을 완성해서 공기창(空技廠)의 [[수조]]실험실에서 항행 상태시 수류의 상황을 조사했는데, 사령탑 주위의 물줄기가 빠를수록 와류가 선체의 겉면을 따라 강하게 흐르는 바람에 추진기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실험결과에 따라서 설계를 변경했다. 1932년에 일본군 해군 상층부에서 요청한 스펙은 전장 25m, 배수량 42t, 수중최고속력 30노트를 발휘하고, 항속력은 50분 이상, 공격수단은 53cm [[어뢰]] 2개를 장착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3개의 설계안을 수립했다. * 제1안은 [[축전지]]만 사용한다. 최고수중속력 30노트를 내면서 항속거리는 60km. 최고수상속력은 25노트를 내면서 항속거리는 50km. 말 그대로 인력으로 조종하는 어뢰수준으로, 자력으로 운항할 수 있는 거리는 극단적으로 짧다. * 제2안은 [[디젤엔진]]만 사용한다. 최고수중속력 30노트를 내면서 항속거리는 926km. 최고수상속력은 25노트를 내면서 항속거리는 556km. 다목적 소형 잠수정으로 사용하기 위해 항속거리에 치중했으며, 잠항 시에는 엔진 구동을 위해 스노켈 같은 물건이 필요하며 잠항심도에 심각한 제한을 받는다. * 제3안은 [[하이브리드|축전지와 디젤 엔진을 같이 사용한다.]] 최고수중속력 20노트를 내면서 항속거리는 30km. 최고수상속력은 15노트를 내면서 항속거리는 278km. 제1안과 제2안의 절충형인데... 이도 저도 아닌 물건이 된다. 당시의 소형 잠수정답지 않게 속도가 빠른데, 그 이유는 원양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30노트의 속도는 당시의 일본군이 예상한 미국 함대의 속도인 20노트의 1.5배로, 이 정도의 속도차가 있어야 제대로 어뢰공격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항속거리 50km는 [[전함]] 주포의 포격거리를 약간 넘어가는 수준으로, 적의 반격을 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거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요구안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일본군 해군은 스스로를 소형 잠수정을 제조할 시 필요한 고성능 축전지, 소형 [[모터]], 내압 선체 등의 물건에 대해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위의 조건을 충족하는 무기의 현실화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위의 3가지 안중 제1안이 갑표적의 기본안이 되었다. 제1안은 앞서 설명된 요구사항을 충족했을 뿐 아니라, 제조가격이 1척당 15만엔으로 예상되었기에 매우 저렴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가격이 상승해서 1942년에는 1척당 30만엔이 되었다.) 해당 계획은 다카사키 다케오(高崎武雄) 대좌가 직접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王) 군령부총장에게 설명해서 결재를 받은 후,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해군대신에게 보고했다. 군령부 총장은 자살특공무기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인정했으며, 해군대신은 상기되었듯 가격이 싸다는 점 때문에 제작을 허용했다. 안건이 통과된 다음, 구체적인 개발을 위한 회의가 만들어졌다. 설계 주책임자인 아사쿠마 조병중좌를 비롯해서 축전지 전문가인 나와 타케시(名和武)등 어뢰, 조병, [[조선]]과 관련된 기술사관들이 참석했다. 개발을 추진한 키시모토 대좌는 어뢰쪽 권위자였다. 하지만 회의에 '''[[잠수함]]의 설계 권위자는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갑표적은 잠수정의 성격보다는 말 그대로 인간어뢰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이는 나중에 나타나는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최초로 만들어진 특수잠항정은 "대잠폭격표적"이라는 이름하에 설계가 시작되었으며, 3개월후에 설계가 완료된 다음, [[구레]]해군공창 어뢰실험부에서 시제품 제작이 시작되었다. 1933년에 완성한 1차 [[프로토타입]]은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 앞바다에서 내압 시험을 실시했으나 수심 100m에서 어뢰발사관실 내부의 부력 탱크가 압괴했다. 1933년 6월에는 축전지에서 발생하는 [[수소]] [[가스]]를 흡입해서 처리하는 장치를 육상에서 시험했다. 이와 더불어서 갑표적 내부에서 수소, [[이산화 탄소]] 농도를 조사했으며, 통풍, 밀폐, 오수 펌프를 시험했다. 그리고 잠수정의 안정성과 흔들림 주기를 확인했다. 이런 검사가 이루어진 후에 무인해상항주시험에서는 24.85 노트를 기록했다. 1933년 10월 3일은 2인이 탑승하는 유인항주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세토 내해]]나 고치 현 등지에서 외양에서의 동작시험도 실시되었다. 1934년 12월까지 실험이 진행되었으며, 해당 실험 기간 동안 시제품은 특수 잠항정 "A 표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험 종료 후, 해당 시제품은 비밀 병기로 취급되어 엄중하게 보관되었다. 1937년에는 일본과 타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2차 시제품의 제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8년 8월에는 개량형의 제작에 착수해서 가능한 한 빨리 2척을 건조한 후, 유인실험을 할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제조된 2척의 실험용 갑표적에 대해 약간의 재작업이나 개조를 실시하면서 동시에 승조원 훈련을 비밀리에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표적을 제조 및 정비하고 승조원을 훈련할 전용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서 [[쿠레]](吳) [[군항]] 인근에 있는 쿠라하시 [[섬]](倉橋島)의 우라사키(大浦崎)에 일명 "P"기지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지는 1942년 10월에 와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조는 다른 해군공창이 담당하고, 승조원 훈련 및 양성으로는 갑표적모함 [[치요다]](千代田)를 이동기지로 선정해서 세토 내해등 각지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1939년 7월 7일에는 제2차 시제 갑표적의 건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2차 시제품 중 1호는 1940년 4월에, 2호는 1940년 6월에 건조완료했다. 그리고 이들의 1척 당 건조 비용은 26만엔이었다. 그리고 2차 시제품의 제조에서도 설계의 중핵은 함정본부의 인원들이 담당했으며, 잠수함 관련 기술자나 현장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2차 시제품들은 1940년 5월 5일부터 6월 6일까지 각종 육상 시험 및 성능 조사를 실시했고, 7월부터 8월에 걸쳐서는 치요다에서의 발진 시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미흡했다. * 해수면에 크게 파도가 치는 등의 사유가 없다면 갑표적 항행시 사령탑이 해상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잠수정에는 필수적인 요소인 [[은엄폐]]를 상실한다. 그렇다고 갑표적의 사령탑을 감출수도 없는데, 이는 후술하겠지만 갑표적의 외부관찰 및 항행시 사령탑 부분이 수면 위로 올라올 필요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표적류 갑~~ * 모의어뢰 발사에 실패했다. 게다가 그냥 실패도 아니고 어뢰가 3분의 1정도 길이로 선수에 있는 어뢰발사관에서 튀어나온 상태로 걸려버렸다. * 내해처럼 비교적 파도가 적은 해면의 상황에서도 갑표적은 통나무 [[카누]]처럼 종횡으로 크게 흔들린다. 여기에 더해서 안정성이 부족하며, [[잠망경]]으로 적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곤란했다. * 갑표적으로 습격하는 전투는 상당한 악천후에서도 가능하다고 판정했으나, 일부 의견에서는 해상에서의 기초적인 공격 능력 자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 갑표적이 전장에 등장한 후에 주요한 사용처가 되는 항구 습격 전투분야에서는 매우 성능이 부족했다. 그러나 1940년 11월 15일에 갑표적은 제식으로 채용되었다. 게다가 시험승조원 중 1명은 갑표적이 실용성이 없다고 상부에 의견을 넣었지만, 시험 종료 후에 강제로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서 입을 막아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8일에 벌어지기 때문에 병기로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숙련된 인원을 조달하며, 훈련을 실시하면서 전략을 수립하는 등의 전력화에 사용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 밖에 없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10월 부터는 갑표적의 양산을 시작했다. 제조 훈령은 10월에는 3호에서 12호까지, 12월에는 13호에서 36호까지 갑표적을 건조하도록 지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