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계시 (문단 편집) == 여담 == [[6.25 전쟁]] 당시 [[유엔군사령부|UN군]]이 북진하자, 북한 정권은 평양을 포기하고 한동안 강계를 [[임시수도]]로 삼았다가 55일 만인 12월 6일에 탈환한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이때 방송으로는 정부를 신의주로 옮겼다고 했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현재도 [[군사분계선|휴전선]] 후방 깊숙히 있으면서도 상당수의 [[북한군]] 전력이 집중된 곳이다. 유사시에는 [[임시수도]] 겸 북한 지도층의 피난처 겸 [[중국군]] 개입 루트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강계 주변에는 굴뚝만 산 정상에 돌출된 지하공장(대부분 군수공업 시설로 추정)과 비밀철도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UN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땅이라는 점에서 [[조선인민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땅인 [[부산광역시]]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다. 만약 6.25 전쟁이 [[6.25 전쟁/대체역사/38선 이북에 휴전선 형성|남한이 평양을 수복한 채 휴전으로 끝났다면]], 이곳이 계속 북한의 수도로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1991년]] 11월 30일, 이 곳의 대표적인 군수공장인 강계 뜨락또르 종합공장(26호 공장) 야적장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곳은 각종 화기의 탄약, 미사일 등을 제조하는 생산기지여서 야적장에는 생산된 다량의 폭발물이 쌓여 있었고, 엄청난 연쇄폭발로 이어졌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nk_nuclear_talks/factoryexplosion-01122018103104.html|#]] 이 사고로 인한 화재 진압 과정에서 생산시설로 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결사대가 지하공장 출입구를 폐쇄했고, 그 안에 갇힌 야간작업조 300여 명 전원이 질식사했다고 한다. 이 외에 지상에서의 사망자도 '''1,0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정확히 1개월 전에 있던 [[평강역 폭발사고]]와 마찬가지로 자세한 내막은 북한 당국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어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알 수 없다.[* 물론 2000년대에는 통신매체의 발달로 인해 북한도 더 이상 대규모 사건사고를 완전히 숨길 수 없게 되어 [[룡천역 폭발사고]]와 [[평양 아파트 붕괴 사고]] 같은 사건사고들이 해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http://www.donga.com/news/Main/article/all/20190808/96876884/1|#]]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의 피난 최종 목적지로 나온다. [[분류:1949년 설치된 행정구역]][[분류:대한민국의 도시]][[분류:북한의 도시]][[분류:자강도]][[분류:한국의 옛 수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