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계식 (문단 편집) == 생애 == 1917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 시절 순회공연을 온 토월회와 극연좌에 매료되어 연기에 뜻을 두었다. 졸업 후 경성부로 상경하여 1937년 졸업 때까지 [[숭문고등학교|경성상업실천학교]]를 다니고 이듬해 지방관리양성소를 수료하여 2년간 중화민국 베이징과 만주를 떠돌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극 구경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연기생활에 완전히 뜻을 뒀으며, 1941년에 극작가 [[유치진]]이 세운 극단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의 1기생으로서 연기에 입문했다. 같은 해 창립작 <흑룡강>의 군중 역으로 데뷔하여 <북진대>의 일진회원 등 단역을 전전하다 1942년 <대추나무>에서 온화롭고 모범적인 캐릭터 동욱 역을 맡아 처음 비중있는 역을 맡아 박수를 받았다. 그 뒤 <에밀레종>, <남풍>, <황해> 같은 함세덕 작품에서 주연을 많이 맡았다. 그러나 1944년에는 동양극장 소속 배우의 영입을 반대하며 탈퇴 사건을 일으켜 유치진과 사이가 틀어졌고, 1945년 8.15 광복 후 이광래 작가 등과 함께 '민족예술무대(민예)' 창립멤버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좌파성향 극단 '청포도' 창립 시 그쪽으로 옮겼고, 1947년 그 극단이 '창조극장'으로 출범할 때도 같이 있었다. 같은 해 '신지극사'가 창립되자 그쪽으로도 몸담았다. 1948년 극단 '신청년' 창단 때 합류하며 동양극장 전속단원이 됐지만, 1950년에 6.25 전쟁을 맞았다. 같은 해 '신협'에 몸담은 후 1951년 새 극단 '상록'에 잠깐 몸담기도 했으나, 다시 신협으로 돌아왔다. 1957년부터 국립극단에 주로 몸담으며 <햄릿>과 <원술랑>, <맥베스>, <붉은 장갑>, <한강은 흐른다> 등지의 굵직한 작품들에 나와 어떤 배역이든 성실히 임했고, 극단 내에서 부단장과 총무까지 맡았다. 1977년 국립극단에서 정년퇴직한 뒤에 극단 '창고극장', '대하', '배우극장' 등지에 몸담으며 꾸준히 연기활동을 해왔으며, 특히 '대하'에서는 1978년 창단 참여 후 초대 대표를 맡았다. 다른 한편 1946년 장황현 감독의 영화 <청춘행로>를 시초로 은막에서도 모습을 드러내 1995년 <[[말미잘(영화)|말미잘]]>까지 꾸준히 나왔고, 1960~70년대 이르러 TV 드라마에서도 발을 넓혔다. 2000년 1월 13일 오전에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