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금실 (문단 편집) === 법무부장관 이전 === 1957년 2월 12일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교육자인 아버지 강계돈(康季敦)[*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애월심상소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2&totalCount=2&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A%B0%95%EA%B3%84%EB%8F%88&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A%B0%95%EA%B3%84%EB%8F%88&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이후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계옥(金癸玉)[* 김영우(金英友)의 딸이다.] 사이의 2남 4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박한철]], [[황교안]] 등이 사법시험 동기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여성 최초로 형사단독판사가 됐다. [[1988년]] [[사법 파동#s-3|2차 사법 파동]]을 계기로 박시환, 김종훈 등과 개혁 성향 법조인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강금실 등 우리법연구회 창립했던 주축은 [[1993년]] [[사법 파동#s-4|3차 사법 파동]]을 이끌며 [[김덕주]] 전 [[대법원장]]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에서 물러나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에는 논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를 이석태 변호사와 함께 저술하며 호주제의 위헌성을 설파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약칭 민변)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