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남구 (문단 편집) === 개발 계획 === 강남 개발은 대한민국 최초의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자, 대한민국의 경제적 중심을 아예 옮겨 버린 가장 성공한 신도시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골에 가까웠던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9월]]부터였다. 서울시는 영등포구 반포동에서 성동구 삼성동에 이르는 땅 800만평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해달라고 건설부에 요청하였고, [[12월 28일]] 건설부가 이를 승인하면서 '법적'으로 개발이 허가되었다. 이때 실무자들은 건설을 시작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1970년에 준공되면 800만 평을 40만 평으로 나눠 3,4년 간격으로 개발할 계획이었는데, 이듬해 4월 정부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하면서 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제3한강교부터 양재동까지 7.6km 구간(지금의 [[한남IC]]~[[달래내고개]])의 토지를 확보하라는 정부의 방침에 대해 지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당근'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개발되려는 지역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최초의 영동 구획 정리 지구는 313만 평이었으나, 고속도로, 도로, 학교, 택지, 공공기관 용지가 확보되지 않아 520만 평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 후반에는 12개 공기업이 들어갈 청사 건립계획이 확정되면서 '''937만 평'''까지 확장되었다. 강남은 당시 서울 시민들에게 교통 불편하고 살기 좋지 못한 시골[* [[강남1970]]이라는 영화에서 나왔듯, 당시만 해도 강남은 말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에 속했지, 사람들 인식에는 어디 경기도에 있는 깡촌이나 다름 없었다. [[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9867581 |1978년 압구정 현대아파트 건설 당시 바로 앞의 농부가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었고]] [[80년대]]에도 도곡동에 초가집이 있었다. 네이버에 '70년대 강남'이라고 쳐보면, 웬 땅을 막 파고 심지어 소를 이용해 쟁기를 끄는 흑백 사진도 있다. 이런 동네가 '''불과 15년 만에 개발되고 30년 만에 최고 부촌 중 한곳이 된 것이다.''' 그 당시의 부촌은 [[용산구]]와 [[성북구]]였다. 물론 여기는 현재까지도 최고의 부촌이다.] 동네로 인식되어 개발이 무척 어려웠기에 서울시에서는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를 시작으로 한강변에 반포 주공아파트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상공부 등 정부부처와 관공서 이전이 추진되어 법원, 검찰 청사등이 옮겨왔으며, 다양한 기반 시설 투자도 집중됐다. 이렇게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자 [[1972년]] [[4월]] 강남으로 인구 및 자본 이전을 유도하기 위해 강북 도시기능을 억제하는 '특정시설제한구역' 조치라는 특단의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 때부터 강남으로 명문고교, 기업과 상점들이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반포동 [[주공아파트]] 등이 완공되고, 뒤이어 [[1976년]]에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1978년]]에는 [[대치 은마아파트]]가 완공되어 1979년부터 입주가 시작된다.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0187|손정목 전 도시계획국장의 회고]]에도 나온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영동 개발은 놀랍게도 10여 년 만에 모두 이루어졌고, 이것도 부족해 수서 개발, [[잠실]] 개발([[1980년대]]),[* 여기도 '''[[한강]]의 흐름 조절''' 등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었다.] 분당 개발([[1990년대]]), 우면-내곡-세곡 보금자리, 판교 개발([[2010년대]])로 강남은 계속 확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