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명도 (문단 편집) === 탈북 이전의 삶 === 1958년 12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읍 하리 칠골동(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2동)에서 아버지 강영겸과 어머니 심계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외국어학원]] [[프랑스어과|불어과]], [[평양외국어대학]] [[불어불문학과|불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남 같으면 당이 시키는대로 평생할 일일텐데, 강명도는 직장 일에 곧 흥미를 잃었고, 강반석 일가였기 때문에 때려치우고 새 직장을 잡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이후 중앙[[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과외교양지도국 외사과 지도원(1979년 9월 ~ 1982년 7월), 평양시당 39호실(노동당 39호실 산하) 지도원(1982년 7월 ~ 1985년 10월), 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1985년 10월 ~ 1986년 7월)을 지내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28세에 문득 군인이 하고 싶다며 가족들을 졸라 1986년 8월부터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으로 배속 되었는데 당시 민간인에서 김정일 사인 한큐에 [[보위국]] 대위로 임관하였다. 보위국은 군 보위사령부로 선군정치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당시 국가보위부는 부장도 없이 공석으로 찌그러져 있었는데 김정일에게 조직 자체가 찍혀서 심화조 사건도 인민보안성을 시킬 정도였다. 보위대학 연구실장 자리는 대좌~소장 사이 편제라 직급을 맞춰주려 1년마다 승진하여 32살에 대좌에 올랐다. 그렇게 승승장구 하다 외국인과 무단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1990년 3월부터 1991년 2월까지 [[평안남도]] [[북창군]]의 18호 관리소에서 수용되기도 했다. 이만갑에서 강명도 본인이 밝힌 바로는 이 18호 관리소에 수용되는 간부급들은 이후 다시 복권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꽤 고생해야 하지만 관리인들이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편의(떡과 고기 등을 제공한다.)를 봐주므로 그렇게 힘든 곳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일반 주민들의 삶을 지켜보고 체험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특권층으로 혜택을 누리는지 되새겨보고 정신차리고 충성을 다하라는 의도다. 강명도가 사라지고 나서 몇달후에 칠골 강씨 집안에서 강명도를 수소문하여 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알려지자 북한역사에 유례없는 칠골 강씨 친족들의 반발과 재조사 탄원으로 김정일이 사건을 재검토하여 강명도는 석방되었고 강명도를 수용소로 보낸 정치위원이 도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강명도급 인물을 수용소에 보내려면 김정일의 사인이 필요 했는데 김정일이 나중에 반발을 보고 "이건 제의서(보고서)가 잘못된 거라서 사인한 것이고, 거짓으로 작성한 놈이 잘못"이란 명분으로 강명도를 수용소로 보내자고 한 정치위원이 도로 독박을 쓴것이다.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1992년 김일성 주석궁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이후 능라 888이라는 외화벌이용 위장회사의 사장없는 부사장 직위로 북한에서 달러를 물쓰듯 하며 호화생활을 누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