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변칠우 (문단 편집) === 서양갑 === >선조(宣祖) 때 의주 목사(義州牧使)였던 서익(徐益)의 서자이다. 같은 서출인 박응서(朴應犀), 심우영(沈友英), 박치의(朴致毅), 박치인(朴致仁), 이경준(李耕俊), 김평손(金平孫) 등과 춘천의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교유하였다. 1612년(광해군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 7백 냥을 강탈했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과 모의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하였다는 허위 진술을 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일은 《광해군일기》 5년 5월 5일 기사에 보인다. >---- >ㅡ 《승정원일기》 영조 8년 임자(1732) 3월 7일(갑자) 맑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U0_A08_03A_07A|#]] 서양갑 (徐羊甲, ? - 1613) 본관은 [[부여 서씨]], 자는 석선(石仙)이다. 의주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이고, [[서필원]]의 조부인 서용갑의 서동생이다. 부친 서익과 모친 사경의 자식으로, 누나 서경신, 남동생 서인갑이 있었다.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서양갑은 허균이 "친히 기른 자"이며 서영갑의 자는 허균이 지은 것이라 한다. >허균이 서양갑의 자를 석선(石仙)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그것은 전설 속의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킨 일에서 뜻을 취한 것입니다. 허균은 매번 하는 말이 ‘오늘날 영웅은 내가 본 바로는 서석선(徐石仙)뿐이다.’... >---- >ㅡ 《조선왕조실록》 기준격의 상소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12024_006|#]] 즉 허균의 [[수제자]]였다. [[송준길]]의 조부 임천공 송응서의 딸의 남편이며, 송준길에게는 서고모부이다. 현재 대덕구 동춘당로 80 동춘당 공원에 있는 소대헌 · 오숙재 고택이 송응서가 서양갑의 재능을 아껴서 준 집이라 한다. 당시에는 동춘당로를 은진 송씨가 살고 있다고 해서 송촌이라 불렀는데, 서양갑과 송응서의 일가가 살고 있는 집은 송춘동 고택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서양갑이 역모 혐의로 죽은 후 송준길의 증손자인 송요화 (宋堯和, 1682 - 1764)와 김호연재 (金浩然齋, 1681 - 1722) 부부, 그리고 송요화와 김호연재 부부의 후손들이 이주해서 살았다. 허균과 친한 관계로 허균이 1607년 12월 공주 목사로 부임할 때 인사차 회덕의 큰 선비 가문 은진 송씨의 집[* [[송준길]]이 사는 집이다.]을 방문하러 현 대전 지역으로 갔는데 만났다 한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부임할 때 송준길은 1살 밖에 안되었다. 링크의 기사에 의하면 동춘당을 만나러 갔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동춘당의 가문 유력 인사를 만나러 간 것으로 보인다. 링크의 기사가 인용한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에서는 동춘당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단지 "송촌에 부임 인사차 방문했다"고 한다.[[https://www.daejeon.go.kr/its/ItsdjNormalboardView.do?boardSeq=876&boardGubun=itsdj01|#]] ] 은진 송씨 문중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서양갑은 비록 서자였지만 "인물이 출중하고 학덕이 겸비하며, 기개가 대단했다"고 하며,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때 서양갑의 이런 면모에서 영감을 받아서 "홍길동"이라는 주인공을 만들었다 한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 실존인물이지만 허균이 창작한 홍길동은 서양갑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 참조.] 송응서는 처가 동네인 송춘동에서 서양갑이 송응서의 딸과 함께 살 수 있게 했지만, 서양갑은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활달해서 송춘동에만 있지 않았고, 가까운 마을 문지동(文旨洞)에 사는 [[박순(조선)|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만나서 서자들을 위한 단체 강변칠우를 [[김장생]]의 서동생 김경손, 심우영 등과 함께 모여서 만들기로 했다. 즉 강변칠우의 지도자는 서양갑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재주는 있으나 서자여서 벼슬을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송촌과 멀리 떨어진 강원도 소양강 가 근처, 여주 양화나루에서 본거지를 두고 무륜정이란 정자를 세워서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시를 쓰면서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개혁을 하려 했다. 이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1612년 문경 세재에서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해서 개혁 자금을 준비했다 한다.[*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 참조.] 1613년 계축년 봄 박응서의 진술을 받은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며, 박응서와 함께 대질 신문을 해도 계속 혐의를 부인하다가 모친 사경[* 서익의 양인 처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2_003|#]] ], 친누나 서경신[* 1613년 당시 전 승지 윤양(尹暘)의 첩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2_004|#]] ], 친동생 서인갑[* 서양갑의 친동생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4025_011|#]] ]이 고문당하고 본인도 4차례 고문을 당하고 죽자[* 압슬과 화형이 3번이라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6_005|#]] ]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과 역모를 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때 허균의 이복 형 허성을 포함한 고명 대신이 언급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6_005|#]] ] 이 고문 과정을 이상하게 여긴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옛 법제를 살펴보건대, 아무리 역적을 국문하는 옥사(獄事)라 할지라도 오직 그 패거리들만 신문하였고 그 결과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나면 죄인의 처자들도 자연히 연좌시키는 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나 처가 아버지나 남편의 죄악에 대해 증거를 설 수는 없기 때문에 처자에게는 형신하며 국문하는 일을 적용시키지 않았으니, 윤기(倫紀)를 밝히려는 뜻이 또한 형토(刑討)하는 가운데에도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덕형은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할 목적으로 처자를 먼저 국문하자고 맨 먼저 청한 결과 사경이 끝내 혹독한 형신을 받게 하고 말았다. 이덕형과 같은 자도 그러하였는데, 박승종처럼 아첨하며 꼬리를 흔드는 자가 하는 말이야 또 책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경신이 형신을 당할 때에 미쳐서 덕형이 법을 인용하며 구해주려 했던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는 누이 동생을 형신하는 것이 법으로 볼 때 부당하다는 것만 알고 그 어미를 형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모른 것인데, 그렇다면 어미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해도 좋고 누이 동생에게는 차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서양갑이 설혹 자기 패거리들 사이에서 함부로 말을 뇌까렸다 하더라도 어찌 그의 늙은 어미가 이를 알 수 있겠는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어미를 엄하게 형신하며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위협하면서 기필코 승복을 받아낸 뒤에야 그만두려 하다니 고금(古今)에 있지 않던 일이었다. >----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2_005|#]] >서양갑이 처음에는 형신하는 과정에서 낙형(烙刑)을 받는 등 참혹하기 그지 없었는데도 조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그의 어미와 형[* 이전 기록에서 언급된 서양갑의 친동생 서인갑을 형으로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이 모두 고문을 받다가 죽고난 뒤, 밤에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 > >고 하였으므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크게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서양갑이 신문을 받으려고 나갈 즈음에 스스로 얼굴에 묻은 피를 씻고서 조용히 공초하였다고 한다. >----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6_006|#]] 이후 철물(鐵物) 저자 거리에서 환형(轘刑)으로 처형당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6_00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