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변칠우 (문단 편집) === 박치의 === >조선 중기의 유생으로,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이다. 박충간(朴忠侃)의 서자이다. 서자는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 있음에 불만을 품고 아우 치인(致仁)과 함께 명문의 서자들인 심우영(沈友英)ㆍ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羊甲)ㆍ이경준(李耕俊)ㆍ김평손(金平孫) 등과 강변칠우ㆍ죽림칠우를 자처하여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 무륜정(無倫亭)을 짓고 시주(詩酒)로 교유하다가, 1612년(광해군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하였다. 이듬해 모두 체포되었으나 혼자 도주하여 행방을 감추었다. >---- >ㅡ 《암서집》 제34권 / 행장(行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663A_0340_010_0030|#]] 박치의 (朴致毅, ? - ?) 본관은 [[상주 박씨]], 호조정랑, 재령군수, 형조참판을 역임한 박충간(朴忠侃)의 서자이다. 친동생으로 박치인이 있다. 친동생 박치인도 박충간의 서자인데 강변칠우의 공식 일원이 아닌데도 친형과 함께 무륜정에서 다른 강변칠우와 교류했으며,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체포되고 고문당했으나 혐의를 끝까지 부정했고 고문 중 사망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505008_002|#]] 아내로 추옥(秋玉)이 있다. 아내는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압슬형을 당했으나 남편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2_002|#]] 1612년 조령에서 박응서 등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613년 다른 강변칠우 인물들이 체포되었을 때 혼자 도주해서 조정이 전국에 수배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3_006|#]] 이후 조정에서 체포하지 못했으며 [[인조반정]] 직전까지 [[생사불명|박치의를 찾을 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